누가 '효정'을 함부로 경계에 세우는가?
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은 여전히 그리 녹록지 않다.
젊다는 이유로 혹은 그렇지 않다는 이유로.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혹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로 혹은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등등. 기상천외한 이유들로 많은 여성들이 부당한 일을 마주하고 있는 일에 여전히 사회는 둔감하다. (반대로 남성은 위의 이유로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일은 극히 드물다) 언제까지 이렇게 무책임한 사회적 묵인이 용인되어야 할까?
영화 <69세>는 효정이라는 여성. 여성 중에서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여성으로도 볼 수 없다는 무례한 사회적 시선에 무자비하게 노출된 '나이 든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무릎이 안 좋아 수술을 받고 재활치료 중인 69세 효정(예수정 분)은 주말 오후 병원 물리치료실에서 간호조무사 중호(김준경 분) 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화면에서 중호가 내뱉는 친절을 가장한 성희롱성 발언과 그것을 불편해하는 효정의 대화 이후 병원 옥상 위에 서서 멍하니 밖을 보고 서있는 효정의 모습을 통해 관객은 효정이 어떠한 일을 경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효정이 의지하고 서있는 링거대에 걸린 쪼그라진 링거팩과 멍든 효정의 가녀린 손목은 효정의 절망과 슬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어떻게든 최대한 잊고 지나치려 했지만 트라우마를 겪으며 일상생활에 지장을 느낀 효정은 고민 끝에 중호를 경찰에 신고하기로 결심한다. 현재 효정과 같이 살고 있는 동인(기주봉 분)의 도움을 받아 경찰서 민원실에서 한 자 한 자 고소장을 직접 쓰는 효정. 하지만 고소 이후 상황은 효정과 동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간다. 범행 장소가 CCTV 사각지대였기에 효정은 피해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고 건조하면서도 무례한 경찰의 질문에 답하며 끔찍한 범죄의 기억을 반복해 끄집어내야 한다. 효정과 중호의 큰 나이차를 이유로 '그게 말이 되냐'는 반응과 범죄 발생 이전에 있었던 효정과 중호와의 일화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치매와 같은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라는 의심까지 받게 되는 효정. 심지어 가해자 중호는 합의에 의한 관계였으며 오히려 자신을 유혹한 건 효정이었다는 주장을 해 효정을 기함하게 한다.
지난한 고소와 조사과정, 반복되는 중호에 대한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보다 효정을 힘들게 하는 것은 주변의 잘못된 시선이다. 중호에게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는 경찰이나 '수영을 오래 하셔서 그런지 몸매가 좋으세요~'라는 수영 수업을 같이 듣는 수강생 모두 효정을 위로하거나 칭찬하려는 말이었겠으나 무심코 던진 그들의 말에는 효정이 '69세를 먹은 노인'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노인을 보고 어떻게 성욕이 생길 수 있냐는 반문 그리고 나이 먹은 여성은 성적으로 매력을 가질 수 없는 존재라는 단정. 이는 곧 '혹시...'라는 효정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이어져 효정과 효정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동인을 더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게 한다.
쉽지 않은 투쟁 아닌 투쟁을 벌이며 효정은 지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동시에 지금 자신이 놓인 현실을 마주한다. 하나밖에 없는 딸과는 연이 끊기고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계속 경제적 활동에 나서야 하는 고단한 삶이지만 그럼에도 효정은 자신이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 자체로 존엄한 한 명의 인간임을 자각한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산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적은 69세라 하더라도 무엇이든 포기하고 싶지 않고 싶다.
영화 말미 효정이 중호에게 보내는 단호한 '일갈'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노인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우리는 함부로 그를 경계에 세워두고 마음대로 판단한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효정을 도와주기 위해 동인이 쓴 전단지보다 효정이 직접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진술서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기정의 순수한 마음이 영화를 보는 내내 고맙지만, 나이와 성별 상관없이 살아있기에 멈출 수 없다는 69세 효정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오롯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독립적 존재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며느리 송가경을 때려잡는 재벌 회장님의 이미지가 강했던 배우 예수정 님. 이번 69세에서는 고단한 삶이지만 흐트러짐 없이 본인의 시간을 충실히 살아내며 영화 마지막까지 품위를 잃지 않는 69세 효정의 모습을 '절실'하게 표현하였다. 끔찍한 범죄를 당한 이후 겪는 수치심과 절망감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까지. 어떤 역할이든 자신만의 기품을 잃지 않고 모든 작품을 장악하는 모습이 매번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