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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 그리움을 배웠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잘은 모르겠지만 알 것 같기도 한 남매의 여름밤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을 느끼며 올해 여름도 이렇게 갔음을 느낀다.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린 상태로 무더운 여름을 잘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며 시작된 2020 여름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는 평소와는 조금 이상한 2020의 여름마저 잘 보내게 되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2020년의 여름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코로나 19로 시작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말 그대로 우리의 발은 묶이게 되었다. 방학 날짜보다 등교 날짜가 언제인지가 중요해졌으며 만원 지하철과 버스로 매일같이 억지로 오가던 회사는 이제 가야만 하는 곳이 아닌 되도록이면 가서는 안될 곳이 되었다.


    그렇다면, 코로나 19가 등장하기 전 보통의 여름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 방학과 푹푹 찌는 공기와 덜덜 거리는 선풍기 소리. 뜨겁지만 어딘지 모르게 나른해지는 기분. 가족 혹은 친구와 함께 먹는 수박과 팥빙수. 어쩌면 우리의 여름은 제각각으로 다르지만 동시에 매우 닮은 모습일지 모른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은 옥주와 동주 남매의 특별한 여름날이 담긴 영화이다. 아빠와 셋이서 살고 있는 옥주 남매는 어느 여름날 친할아버지의 2층 양옥집에 '얹혀살게'된다.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허락을 맡았으며 아주 잠깐 지낼 것이기에 편히 있으면 된다며 호기롭게 이야기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옥주. 오랜만에 만난 할아버지 역시 세 사람을 반기기보다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투명인간처럼 대한다. 그 와중에 고모부와 싸운 것 같이 보이는 고모마저 할아버지 집으로 찾아오면서 생각지도 못하게 옥주 가족 3대가 모여 여름을 같이 보내게 된다.


생각지도 못하게 할아버지 집에서 모여 살게 된 옥주 가족


    이후 영화는 특별한 사건 없이 할아버지 집에서 모여 살게 된 옥주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구태여 옥주 가족이 모여 살게 된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우연히 같이 살게 된 이후의 일상을 담담히 담아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할아버지의 생일 파티도 있고 옥주가 아빠가 팔고 있는 짝퉁 운동화를 훔쳐 남자 친구에게 선물로 준 일도 있었고 고모와 싸운 고모부가 찾아와 조금 시끄러운 일도 있었지만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그 마저도 그냥 담담하게 보여줄 뿐 극심한 갈등이나 감정을 애써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물론 옥주를 비롯해 그 시간을 경험하고 있는 옥주의 가족들에게는 나름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을지 몰라도.


옥주 남매의 보호자인 아빠와 고모. 하지만 그들 역시 불안한 존재이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이 다른 가족영화보다 더 정감 있고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영화 속 옥주의 보호자라 할 수 있는 '어른'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다. 옥주의 아빠는 우리들의 아버지가 그렇듯 영화 속 가족을 위해 무엇이든 턱턱 해내는 영웅의 모습이 아니다. 옥주 남매를 키우기 위해 나름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결혼에 실패하였고 늙은 아버지의 2층 양옥집에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신이 이제부터 아버지를 모시겠다 말했지만 사실 길거리에 나 앉을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아버지의 집으로 '도망'온 것이나 다름없다. 남매의 고모 역시 평탄치 못한 결혼생활을 피해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도망쳐와 다락방에 있는 술을 훔쳐 먹고 늦은 밤 홀로 담배를 피우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말 그대로 두 사람 모두 어른이기에 옥주 남매의 보호자에 위치하지만 사실 그들 역시도 자신의 몸 하나도 건사하지 못해 나이 든 아버지에게 도망쳐 온,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지만 삶의 무게라는 현실적인 핑곗거리를 앞세워 나이 든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보내고 아버지의 2층 양옥집을 팔려는 것도, 그마저도 똑같이 나누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 형제와 묘한 긴장감을 형성하기도 하는 것도 아빠와 고모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이는 과거 어려서 잘 몰랐던 부모의 나약함과 어려움을 보여줌과 동시에 현재 성인이 되었지만 우리의 부모가 그렇듯 자신 역시 완벽하지 않은 모습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까지 투영하게 만든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의 주인공이자 중요한 화자인 옥주


   옥주(최정운 분)는 영화 <남매의 여름밤>의 주인공이자 영화의 중요한 화자이다. 한창 예민한 시기에 갑자기 낯선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장녀라는 책임감에 크게 내색을 하지 못한다. 그 나이 때의 툭툭 거림과 함께 할 수 있는 반항은 방에 설치한 모기장에 동생 동주가 못 들어오게 하는 정도. 물론 이성친구에 눈을 떠 아빠가 팔고 있는 짝퉁 운동화를 남자 친구에게 몰래 선물하거나 쌍꺼풀 수술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아빠의 운동화를 중고나라에 팔려다가 시비가 붙기도 한다. 신체의 성장과 호르몬의 변화로 시한폭탄을 마음속에 숨겨두고 있는 사춘기를 옥주 역시 평범하게 지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 시기의 예민함과 까칠함 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사춘기 소녀의 모습을 배우 최정운은 부러 꾸미지도 부러 과장 히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잘 표현했다.

    모든 성장영화의 주인공이 그렇듯 옥주 역시 여름이 끝나가는 영화 말미 '성장'을 하게 된다. 가족을 떠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해 동생 동주가 들고 온 엄마의 선물을 빼앗을 정도로 엄마에 대한 미움이 강했던 옥주이지만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그동안 숨겨온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펼쳐놓는다. 비록 꿈에서 만난 엄마이고 꿈에서만 화목한 가족이었지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조금의 특별한 여름방학을 보낸 이후 옥주는 할아버지가 더 이상 계시지 않는 2층 양옥집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갑작스레 마주한 할아버지의 부재도 슬프지만 어쩌면 옥주는 이렇게 끝나가는 여름이 평생 동안 그리워할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참 신기한 영화다. 옥주와 동주 남매의 특별한 여름이야기지만 그때의 옥주 남매가 느꼈던 온도, 느낌, 냄새가 뭔지는 알 것 같은. 하지만 말로 표현하자면 어려운. 나의 할아버지 집은 2층 양옥집이 아니었으며 한 번도 할아버지와 고모와 함께 산 적이 없음에도 남매의 여름밤이 옥주 남매의 여름밤만이 아닌 내 과거 어느 여름밤 같은 느낌 적인 느낌. 옥주 남매의 특별한 여름밤이었으나 그 여름밤은 우리가 각자 가지고 있는 그리운 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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