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길종 감독의 영화는 미국에서 그와 함께 영화를 공부했던 뉴 할리우드 세대들의 영화를 닮았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바보들의 행진>은 특히 1970년대 청년들의 저항정신과 방황으로 점철되어 있다. 한편으론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던 1960대가 지나고, 본격적으로 TV의 보급이 이뤄진 1970년대는 한국영화의 침체기로 여겨지고 있었다. 검열은 검열대로 이루어졌던 터라 한국영화계는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길종 감독을 비롯해, <별들의 고향>을 연출한 이장호 감독 등은 한국영화의 예술화를 도모하기 위해 '영상시대'라는 운동을 주도한다. 당시의 젊은 감독들이 한국영화의 미래를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으로써 이룩한 성취와 실험성은 암울했던 1970년대를 한국영화의 전환점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영상시대의 중심에 있었던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은 그러한 점에서 커다란 영화사적 의의를 가진다. 그의 반골적인 태도는 영화 속에서 청년문화로 상징되어 살아 숨 쉴 수 있었고, 영화에 삽입됐던 송창식의 노래들이 후에 기득권에 저항하던 학생들의 데모에 사용됐다는 점에서 당시 한국사회를 그대로 담은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도 막 도입하기 시작했던 줌 렌즈부터, 많이 사용되지 않던 오블리크 앵글까지, 하길종 감독의 도전적인 시도들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한국영화를 논할 때 빼놓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이 작품은 바보를 다룬다. 그렇다면 바보는 누구인가? 저항하지 못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청년들이 바로 바보다. 병태와 함께 극을 이끌고 가던 인물인 영철은 결말부에 다다라서 동해바다에 몸을 던진다. 하길종 감독이 왜 원작에도 없는 영철이란 캐릭터를 영화 속에 담았을지를 생각해보면 그 답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다 보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있는 이유는 검열 때문이다. Y대의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기 위해 학교를 뛰쳐나가는 장면, 일본인에게 매춘을 당할 위기에 빠진 여성을 구하려다 싸움에 휘말린 병태와 영철의 모습이 다양한 이유로 스크린에 오를 수 없었고, 우리는 감정선을 따라 영화를 감상할 수밖에 없다. 또한 영화에서 특정 장면을 제외하곤, 밝은 내용의 장면에서조차 어두운 음악이 지속된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현실에 대한 하길종 감독의 태도와 억압된 청춘들의 정서가 드러난다.
이 영화는 거창한 이야기를 담지 않는다. 그저 대학생들의 만담과 일상에 가깝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낸 것이 없다고 좌절하는 영철은 동해바다로 가서 고래를 잡겠다고 말하고, 돈을 벌지 못하는 철학과라는 이유로 사랑도 마음껏 할 수 없는 병태는 술과 함께 방황한다. 그들의 빛나는 청춘은 항상 어둠을 동반하고 있다. 병태와 영철, 이 두 명의 인물이 각각 선택한 자살과 입대는 그 방황을 회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던 청춘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길종 감독은 그들을 오블리크 앵글로 비뚤어졌으면서도 불안정한 청춘들의 내면을 표현하고, 곳곳에 정지된 화면으로 찰나의 희망을 조금이나마 더 오래 붙잡으려는 듯한 장치를 배치하며 주제를 견고하게 강조하고 있다.
영철이 술자리에서 자신의 사업계획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영철은 비가 오는 날에도 담배를 필 수 있게 해주는 발명품으로써 일명 담배 우산을 만드려고 한다. 술에 취한 상태로 말한 이야기라 필자도 그 계획이 진지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담배 우산과 비로 비유되는, 현실과 영철의 관계에 있다. 영철은 우산이 필요하다. 그에겐 현실을 가득 메운 방황에 종지부를 지어줄 우산이 필요하다. 물을 피하지 못한 영철은 끝내 물에 몸을 맡기고 만다. 우산도, 사랑도, 입대마저 허락받지 못했던 그에게는 동해바다와 고래보다 현실 속 방황으로부터의 극복이 더 허황된 탓이다.
병태는 영자와의 데이트에서 사슴을 바라본다. 그런데 그 사슴은 우리에 갇혀 있다. 사슴이 아름답지 않냐는 영자의 말에 병태도 그렇다고 하지만, 병태는 아름다움에 집중할 수 없다. 아름다우면서도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는 사슴에게서 병태는 분명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청춘이라는 시기를 방황 속에서 보내야 하는 청년들의 고뇌는 이 작품 내내 담겨있다. 어떨 때는 음악에, 어떨 때는 연기에 담겨있다. 희망을 노래하고, 방황에 좌절하는 청춘의 모습은 당연한 것일까? 청춘을 청춘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사람들의 모습을 오늘날에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은 그 질문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나도 나의 청춘에 대해 깊게 고민해봐야 할 시점임은 분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