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책방 25.

이재인으로 살아내기

by 이창우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던 때는 개인마다 다르다. 일찍 깨달을수록 빨리 자유로울 수도 더욱 깊이 그 자리를 파고들어 이용할 수도 있다. 생각을 적게 하다가 안 하게 되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가장 편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내 삶이 정치라는 구호 혹시 알아요?


또박또박 말하면서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뜬 채 서연 씨가 말한다. 이럴 때면 작은 몸집에서 이렇게 우렁찬 목소리가 나온다는 게 신기하다. 나는 선희에게 늘 듣던 이야기다. 주은 씨도 목소리를 보탠다. 한 순간이라도 저런 열정에 휩싸이고 싶다. 나는 왜 큰 소리로 외칠 수 없을까. 어쩌면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고 늘 도망친 것은 아니었나?


기본소득은 페미니즘을 활성화할 수 있는 대안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서연 씨 말은 틀린 경우가 없다. 말하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한다. 다만 그 경험을 따져보는 일은 정작 하지 못했다. 여성이라고 모두가 같은 처지도 아니고 다름에서 생겨나는 갈등은 필연이다. 그 갈등을 풀어나갈 방법은 찾지 않는다. 가장 쉬운 방법은 외면하기다.


이십 대는 다 아는 사실을 다른 세대 어른들은 모르더라고요. 페미니즘만 해도 엉뚱하게 받아들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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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 씨는 입 다물고 사는 게 방법 중 하나란다. 설명하자면 힘이 너무 빠져서 언제부터인가 나이 많은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된다고 한다. 두 사람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침묵이라는 장벽이 이 사회에 얼마나 많이 세워져 있는가를 생각한다.


나는 재인 씨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요.


두 사람은 미리 말을 맞춘 것처럼 말을 한다.


내 가요?

혼자서 이렇게 살아가려는 결정을 하고 지역으로 내려왔다길래요.


주은 씨가 말을 마치자 옆에 있는 서연 씨도 고개를 끄덕인다.


혼자 살기로 결정한다는 것과 페미니스트인 것과는 결이 다른 대요.


금지와도 페미니스인가 아닌가로 어지간히 말싸움을 한 기억은 있다. 나는 틀에 갇힌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하건 하지 않건 이재인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순간 엄청나게 반발할 이 땅에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나는 분명 불분명한 구석이 있고 이분법으로 나눈 그 단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저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하며 산다. 남들은 졸업 후 취업을 위한 무엇인가를 배워 자격증을 따거나 공시생이 되거나 명분이 있다. 취업준비생이라는. 아무것도 안 하는 나를 마치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취급하는 눈빛이다. 현재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이재인으로 살고 있는 순간이다.


길은 만들어가는 것일 텐데 반드시 잘 닦인 길을 가기에 인생은 너무 길지 않을까. 구부러지고 뒤틀려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 길 위에서는 많은 생명체를 만날 가능성이 넘친다. 각자 방식으로 살아온 다른 사람과 야생에 핀 풀과 이름 없는 꽃들, 땅과 나무를 벗 삼아 공생하는 존재들.


생각으로 잠시 흐른 침묵에 가장 좋은 해결책은 먹기다. 미리 준비한 떡볶이를 가져와 그 순간을 넘겼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 단어에 갇히는 기분이 든다고 말하면 되는데 하지 못했다.


와. 이 떡볶이를 재인 씨가 직접 만들었어요?

진짜 떡볶이집 수준인데. 아니 더 맛있어요.

두 사람이 출출했나 본데‥ 그 정도는 아닐 건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떡볶이 집도 같이 해버려요.


서연 씨 말에 한바탕 웃는다. 누군가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행복해지면 덩달아 행복하다. 역시 먹는 즐거움은 빼놓을 수 없는 쾌락이다. 다음에는 요리 재료를 사 와서 같이 해 먹기로 하고 늦은 저녁에야 헤어졌다. 책방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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