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이가 와서 기억하기 행사는 첫 번째 하는 작은 행사치고는 잘 치른 셈이다. 참여한 사람들에 슬픔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는 이 사회가 주는 분노를 닮았다. 행사를 마치고 함께 맞은 저녁은 침울했지만 해가 바뀌고 만난 정윤은 인턴 일이 힘든지 초췌하다.
내게는 9년 전 4월 16일도 보통 그렇고 그런 날이었다. 고3이 되면서 3월 모의고사 후유증 앓기로 지쳐버린 기억. 전공을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뒤척이던 밤. 나는 지나온 2014년 4월 감정들이 누적포인트처럼 쌓아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마지막 기차를 타고 갈 거야. 내일 출근하니까
힘들겠다. 같이 해줘서 고마워.
다른 이유로 온 것이긴 해.
무슨 이유가 또 있어?
네게 할 말이 있거든.
안 좋은 일이 있니?
이재인, 내가 너를 사랑해.
찰나에 스치는 붉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선명한 기억.
고백하는 거지. 이거?
그럼 뭐겠어?
생각해 봐도 되니?
뭘?
네가 하는 고백에 대해서.
이재인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대략 난감이다. 뜬금없이 말을 내뱉고 내 감정마저 제 멋대로 확인해 버리다니. 이런 고백을 또 받게 되다니 이번은 잘 생각해서 말하고 싶었다.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면 되는 건데. 고백은 멋진 사랑하기 연애 시작을 알려주는 첫 번째 용기인데. 반응할 수 없는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스물에 받은 고백은 생각이고 뭐고 단번에 거부할 수 있기에 후유증을 앓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정윤이 알 리 없다.
정윤은 생각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는 기차 시간보다 서둘러 책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멀쩡할 수가 없는 상태로 긴 밤을 지나고 정윤에게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기만 했다.
이미 5월이 시작되고 있다. 고백을 듣고 무언가 행동하지 않으면 어쩐지 불행한 일이 닥치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편안함을 유지하던 일상이 덜그럭 거린다.
긴 말 할 것 없이 나도 사랑하기로 하자. 이렇게 결정하고 나니 사랑한다는 말에 응대하는 일이 그리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내 5월에 화사함을 선물하기로 사랑을 선택한다.
우리 이제는 우정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거지? 연애 시작이다.
뭐가 뭔지 모를 말을 적으며 메시지를 보내버린다. 새벽 3시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나버렸는지도 생각하지 못하고는 일을 저질러 버린다.
그래, 연애해 보는 거다. 못할 것도 없지만 우리가 장거리 연애로 지속 가능할지는 모른다. 이런 비슷한 감정에 시인을 떠올렸는데 다시 그 두 문장이 내게로 온다. 진짜 사랑은 무엇인지 알아가 보기로.
중대한 일을 한 내게 말을 건다. 알 수 없는 대상이 내 머릿속에서 시시덕거린다. 실수한 거야. 지난번 연애 시작했다던 정윤은 그 실수를 또 되풀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한편으로는 무척 성가시다. 갑작스럽게 듣게 된 고백으로 내 일상이 엉키고 있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풀어 나가는 것이 해법이라고 여겨왔다. 단 칼에 잘라버리겠다는 그 인간이 생각나는 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