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 속에서 느끼는 웅장함의 조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데 있다.
- 토머스 헨리 헉슬리
어릴 시절부터 방랑벽이 있어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나는 오랫동안 꿈꿔 오던 것이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보는 것. 내 방의 한쪽 벽에 나란히 걸려 있던 우리나라 지도와 세계 지도. 지도를 매일 들여다보면서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검은 실선을 눈으로 좇았다. 그러면서 나는 언젠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여행하겠다고 다짐했고 그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생각할 때면 항상 모스크바가 떠올랐다. 모스크바는 쉽사리 익숙해지지 않는 도시였다. 러시아가 유럽에 속해 있기는 했지만 모스크바는 유럽과는 동떨어져 보였고 너무나도 멀어 보였다. 눈 덮인 모스크바. 차갑고 정적인 이미지로 점철된 모스크바가 내 머릿속에 있었고 나는 모스크바가 엄숙하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가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0 장소 : 러시아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 역(기차역 이름이 '모스크바 역'이다)을 출발한 기차는 8시간을 달려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 역에 도착했다. 아침 5시. 모스크바는 이제 막 어둠을 걷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빠르게 흩어졌고 거리엔 나 혼자였다. 서서히 햇살이 스미는 역 앞의 공원. 그곳에서 마주한 거대한 건물은 러시아-모스크바-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스탈린 양식의 건물이었다. 러시아에 관련된 책을 보았다면 한 번쯤 봤을 법한 모양의 건물. 러시아 역사를 공부했던 나로서는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고풍스러우면서도 엄격함을 엿보이는 스탈린 양식의 건물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건물이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는 '힐튼 호텔(정식 명칭은 힐튼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스카야)'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공산주의의 상징적 인물인 스탈린이 소련의 최고 지도자로 있을 때 지어진 대표적인 '스탈린 양식'의 건물이자 지금은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이 작금에 이르러서는 자본을 앞세운 미국의 호텔 기업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는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역의 오른편에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출발하는 야로슬라브스키 역이 있다.
숙소에 들러 잠깐 동안의 휴식을 취한 후 거리로 나섰다. 내가 찾은 곳은 야로슬라브스키 역. 그곳은 내가 아침에 기차에서 내렸던 레닌그라드 역의 바로 옆에 나란히 위치한 곳으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발착지로 사용되는 역이었다. 야로슬라브스키 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대륙의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거나 몽골을 지나 중국의 베이징으로 향했다. 야로슬라브스키 역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 티켓을 받아 들었을 때의 설렘. 내일이면 기차를 타고 4박 5일간의 여정을 시작한다. 나의 목적지는 바이칼 호수를 곁에 둔 도시 이르쿠츠크였다.
티켓을 고이 가방 속에 넣어 두고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붉다'라는 말이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모스크바의 중심이라 할 만한 곳이다. 지금의 러시아는 파란색도 붉은색도 아니었지만 소련이 붕괴하기 전, 이곳에는 공산주의 운동가들의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이 있던 곳이다.
사실 이곳 붉은 광장의 '붉은'이라는 이름은 공산주의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던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자본주의는 파란색으로, 공산주의는 붉은색으로 이미지화되었고 공산주의의 대표적인 국가인 소련을 대표하는 색상도 붉은색이 되었다. 지금의 중국을 색상으로 표현할 때 '붉은색'으로 나타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 같은 공산주의의 이미지화는 내 머리 속에서 모스크바의 중심 붉은 광장에까지 연결되었고, 이곳 붉은 광장에 직접 와 보기 전까지도 나는 공산주의와 붉은 광장이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간이라고 믿고 있었다.
※ 붉은 광장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 밖으로 빠져나오면 '볼쇼이 극장'이 보인다(왼쪽). 볼쇼이 극장 앞쪽에 있는 마르크스 조각상.
※ 붉은 광장으로 향하는 길. 진홍색깔 건물들이 눈에 띄면서 이곳이 붉은 광장임을 드러내고 있다.
지하철 역을 빠져나와 역사박물관 뒤쪽 모퉁이를 돌아서서 광장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웅장함.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느꼈던 것처럼 규모가 나를 압도해왔다. 저 멀리 햇살을 받으며 빛나고 있는 바실리 성당은 내가 동화 속 신비의 나라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적색 벽돌로 만들어진 벽, 그 너머의 크렘린. 크렘린의 맞은편에 위치한 중세 유럽의 궁전 같은 느낌을 전해주는 백화점 굼. 광장에는 햇살이 가득했고 새하얀 구름은 손에 잡힐 듯 낮게 흐르면서 광장의 분위기를 한층 더 산뜻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광장의 사면, 역사 박물관과 크렘린 바실리 성당과 굼 백화점은 거대한 광장을 가운데 두고 서로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면서 붉은 광장이 가장 모스크바 다운 곳으로 빛날 수 있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스크바 다운 느낌, 낯설게 하기. 낯섦 속에서 느끼는 웅장함의 조화. 붉은 광장 한가운데 선 나는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아보았다. 내가 상상하던 모스크바가 이곳에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이곳은 정말 모스크바 답다라는 생각을 했다. 가슴속 저 끝에서 부터 부풀어 오르는 만족감.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바실리 성당과 그 반대편(역사 박물관쪽)에 있는 카잔 성당.
※ 지금은 대통령궁으로 사용되고 있는 크렘린. 굼 백화점 앞에는 노천 카페들이 늘어서 있었다.
붉은 광장을 떠나 길을 걸었다. 내가 향한 곳은 예술가의 거리로 불리는 아르바트 거리였다. 젊은 사람들이 활보하는 거리는 활기차 보였지만 금세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도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숙소에서 나오기 전, 오후에 비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빗방울은 생각보다 빨리 떨어졌다. 비를 피하기 위한 사람들이 지하철역으로 몰려들었고 나도 그들을 따라갔다. 비가 오는 거리,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 거리에는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사람들을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이 있었다. 아르바트 거리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비가 내렸고 나는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탈린에서 만났던 베레나가 보낸 페이스북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다시 탈린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녀는 이번 여행의 종착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고 했고 그녀의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내일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이르쿠츠크로 갈 것이라고, 조심히 돌아가라고. 그녀로부터 한 통의 새로운 메시지가 온 후, 더 이상의 메시지는 오가지 않았다.
"여행 잘 해. 나중에 꼭 오스트리아에 놀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