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상상하던 시베리아의 모습은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건 없단다.
꿈을 이루는 데 시간 제한은 없어.
-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나의 로망이었다. 어쩌면 여행자들의 로망이라고 말해도 될 지도 모른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일을 상상할 때면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언젠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볼 것이라는 생각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던 나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기어코 모스크바로 향했다. 여행 루트는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로망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열차를 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레던 나였다.
기차 여행의 종결. 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를 것이었다. 시베리아의 진주라 불리는 바이칼 호수의 관문, 이르쿠츠크. 그곳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85시간. 4박 5일 동안 기차를 타고 가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내가 내린 뒤에도 기차는 계속해서 동쪽으로 달려갈 것이었다.
횡단열차의 시발점, 야로슬라브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떠나는 사람들과 배웅나온 사람들이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 기차를 타는 사람들은 모두 오랜 시간 동안의 헤어짐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플랫폼에 들어선 기차. 플랫폼의 양쪽 끝을 바라보았지만 기차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타야할 객차를 찾는 것도 한참이 걸렸다. 16번 객차. 내가 가진 표는 3등석 티켓, 흔히 일반석이라 부르는 6인 1실짜리 쁠라쯔까르타였다. 여행자들이 많이 탄다는 4인 1실의 쿠페가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 나의 여행에는 고급이나 특실은 없었다. 인도 여행을 할 때도 항상 2등석 기차표를 구입했고 그마저도 없으면 3등칸을 타고 움직였다. 일반석. 그곳에는 보통의 삶이 있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광활한 시베리아의 모습이 창밖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흥분되기 시작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침엽수들이 빼곡히 늘어서있는, 얼어 붙어 있는 땅들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있는 시베리아.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기차를 상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4박 5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기차안에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할 지 고민 되었다. 인도 여행을 할 때, 2박 3일짜리 기차를 타 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내가 오른 이 기차에서는 그 두 배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더욱이 그리스에서 배낭을 도둑맞으면서 책들을 몽땅 잃어버린 터라 내게는 지루함을 달래줄 그 무엇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차 안에는 먼 여정을 함께할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 자리는 좌석의 가장 위쪽에 위치한 침대였다. 나는 기차의 천장에 바짝 붙어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는 주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은 칸에 함께한 5명. 나를 포함한 3명은 바이칼 호수 서쪽에 위치한 도시 이르쿠츠크가 목적지였고 한 명은 바이칼호수의 동쪽 울란우데까지 간다고 했다. 나머지 두 명은 이르쿠츠크에서 하룻밤을 더 가야 도착할 수 있는 치타가 목적지였다.
좌석과 좌석이 마주보는 그 중간에 놓인 테이블. 열차 출발과 함께 테이블 위에는 술과 함께 먹을 거리들이 놓여졌다. 앞으로 최소한 4박 5일을 함께해야하는 여행 동료들인 만큼 우리는 서로를 반겼다. 가볍게 맥주 한 잔. 기차의 출발과 함께 술잔이 채워졌다. 지루함을 달래주는 동시에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데는 술 만한 것이 없었다. 내가 탄 열차에 여행자처럼 보이는 사람은 나 혼자였고 모두들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모스크바를 빠져나온 기차. 대륙의 동쪽을 향해 뻗은 철로를 달리는 기차는 큰 역이 있는 도시에서는 오랫동안 머물렀다. 큰 역에 기차가 멈춰설 때 마다 사람들은 기차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플랫폼에는 온갖 먹거리들을 파는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사람들은 기차가 멈춰설 때마다 가판대를 기웃거리며 먹을 것을 샀다. 기차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기차역의 가판대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가판대를 곁에 두고 사람들은 이야기 꽃을 피웠다. 기차의 경적이 울리면 사람들은 다시 기차에 올랐고 플랫폼에는 기차의 움직임이 전하는 떨림만이 남았다. 기차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시간에 대해 무뎌진 감각. 기차 안에서의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했다. 손목에서 돌아가고 있는 태엽이 아니었다면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잠을 자다가 깨어나 창 밖을 바라보면 어제 보았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또 다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도 똑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좀처럼 바뀌지 않는 창 밖의 풍경. 잠에 취해 슬며시 눈을 떠서 창 밖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초록색의 들판에 나무가 심어져 있는 풍경만이 보일 뿐. 몇 시간이 지나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여전히 창 밖에는 초록색 덤불 사이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상상하던 시베리아의 모습은 아니었다.
똑같은 풍경의 무한 반복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약간의 변화가 있다면 밖이 어둡거나 밝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 기차의 테이블에는 항상 먹을 거리들이 펼쳐져 있었고 잠에서 꺠어날 때 마다, 깨어난 시간이 언제가 됐든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며 맥주 한 잔씩을 들이켰다. 배가 고프면 컵라면을 먹거나 빵을 먹거나 그도 아니면 햇반을 데워 먹었다.
밤이 지나면서 바뀐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시간이었다. 세계표준시간대를 하루에 하나씩 지나는 기차. 밤이 지날 때 마다 나는 시계의 시간을 한 시간 빠르게 돌려야 했다. 모스크바의 시간은 UTC+3이었고 이르쿠츠크의 시간은 UTC+8이었다. 5일 동안 하루에 하나씩 시간대 하나를 통과하면서 한 시간씩 짧아졌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을 향해 달리는 기차의 하루는 23시간이었던 것이다.
어느덧 기차가 이르쿠츠크 역에 도착할 때가 되었다고 했다. 벌써 5일이나 지나버렸다니. 믿기지 않았다. 약간은 지루하게 느껴졌던 2일. 그러나 그 후의 3일은 겨우 하루 정도가 지난 것처럼 느꼈을 뿐인데 어느덧 3일이나 지나버렸던 것이다. 5일 간의 기차 여정은 내가 겪은 것이 아니라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르쿠츠크 역을 떠나려는 기차에 다시 오르고 싶었다. 5일 간의 기차 생활이 짧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들 줄은 몰랐다. 어쩌면, 아쉬움의 마음은 이제 더 이상은 '시베리아 횡단열차(Trans Siberian)'을 탈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기차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아닌 몽골 횡단열차 -트랜스 몽골리안(Trans Mongolian)-였다.
로망의 끝. 설렘이 사라져버린 자리에 남은 공허가 주는 아쉬움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