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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준 Jan 23. 2020

연인, 배우자에게
하지 말아야 할 질문

눈물이 마르는 시간

세상에 단정할 수 있는 건 없다


사람들은 너무 극단적이다. 양단간에 명확한 답을 얻으려고만 한다. 행복한지 불행한지 분별하려 하고,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선택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애쓰고, 답이 맞는지 틀리는지 결과를 알고 싶어 한다. 삶이 그토록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엉키고 설켜서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고 너무 복잡해서 눈자위가 빙빙 도는 큐브 같은 것이 삶인데, 마치 x만 알아내면 성공하는 방정식 문제처럼 쉽고 간단하게 삶을 단정하고 싶어 한다. 거미줄 같은, 복잡하지만 단단한 무엇이 한 번 쓸고 지나가면 무너져버리는 거미줄 같은, 그런 인생을 두고 말이다.



나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행복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가진 게 없어 때론 서글프고 비참하지만, 불행하다고 말하기엔 서글프고 비참함을 무릅쓰고 살아가는 내가 대견하다. 그러니까 나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

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기 때문에 양쪽 모두에 문이 열려 있고 언젠가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있다.


‘어? 오늘도 살았네?’

그 생각에 묻은 진심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잘 모르겠다. 살았으니 사는 건데, 살아야 하니까 이왕이면 잘 살고 싶다. 먹을 것이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식량을 사러 하산할 핑계가 생겨서 그것도 나쁘지 않다. 라면을 먹을 때 김치가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나트륨을 덜 섭취하니 그것도 좋다. 지긋지긋한 빚을 다 갚으면 좋겠지만 빚 때문에 더 악착같이 살고 있으니까 어쩌면 그것도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가만 생각해보니 결국 긍정의 효과인 듯싶지만, 나는 그리 긍정적인 사람은 아니다. 나는 중학교에 다닐 적부터 자살하겠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매우 비관적이었고, 불평불만에 가득 찬 위태로운 인간이었다. 그건 학창 시절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비관주의자나 염세주의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태도가 긍정적인 사람이랑 다르지 않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나처럼 삶의 허무함에 고뇌하고, 자존감과 열정이 무너진 사람이 아침을 대하는 태도는 ‘오늘도 살아야 하네?’다. 범사에 감사하고 살아 있음이 행복한 긍정적인 사람이 아침을 대하는 태도는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지!’다. 살았다는 의미가 한숨과 함께하든, 기쁨과 함께하든, 오늘을 또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매번 인식하는 사람은 그 두 종류다. 물음표와 느낌표. 그 둘의 차이. 뒤집어 생각하면, 물음표를 많이 던지는 사람과 느낌표를 많이 던지는 사람 중 어느 쪽의 삶이 더 깊을까. 왜 마침표나 느낌표를 찍으며 살려고 할까. 왜 의문형으로 두면 안 되는 걸까. 어차피 탄생과 죽음 모두 의문인데. 삶 자체가 의문인데.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하지 말아야 할 질문


사랑하는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하지 말아야 한다. 두 가지 대답 중 어느 한 가지는 거짓말일 테니. 사랑한다는 말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도 매 순간 진실이지는 않다. 웃고 있는 사람에게 행복하냐고 묻지 말아야 한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 불행하냐고 물을 용기가 없거든, 행복하냐고도 묻지 말라는 말이다. 웃고 있는 얼굴이 항상 행복을 반영하지는 않기에. 억지로 웃고 있는 사람을 굳이 울릴 필요는 없으므로.



76억의 얼굴에서 행복과 불행의 표정을 판단하는 건 신도 하지 못할 일이다. 대답하는 쪽도 자신의 대답을 신뢰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방정식 x의 값처럼 확신할 수도, 채점할 수도 없는 것이니까. 행복과 불행이, 삶이 그런 거니까.


내가 아는 여인이 자신은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행복해지고 싶어?”

그녀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는데 행복이 뭔지는 알고 바라는 거야?”

그녀는 당황하면서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그녀도 행복했던 적이 있으므로 행복하길 바랄 것이다. 한참 뒤에 그녀가 물었다.

“그럼 넌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


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말해주었다. 나는 지금보다 더 불행해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지금이 바닥이니 아마 더 나빠질 일은 없을 거라고. 굳이 행복과 불행으로 말하자면, 나는 행복해질 일만 남은 것 같다고.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조그맣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맞아!”




세상에서 가장 까다롭고 냉정한 판단이 자신을 평하는 것이지 싶다.
그게 바로 되어야 비로소 남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눈물이 마르는 시간>


*이 글은 <눈물이 마르는 시간>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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