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2019년 2월의 하프 타임이 시작되기 전날, 영국 각지에서 지구온난화 대책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전국의 60개 장소에서 열렸으며 약 1만 5,000명이 참가했다고 BBC가 보도했다.
2018년 여름에 기록적인 무더위와 큰 산불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스웨덴에서 열다섯 살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2주 동안 학교를 쉬고 (툰베리는 이를 ‘학교 파업’이라고 불렀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전 세계에 확산된 학생운동이 영국에서도 불붙은 것이다.
우리 고장 브라이턴은 영국에서 처음 녹색당 국회의원이 선출된 곳으로 환경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학생 시위도 유난히 대규모로 조직되었는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드러났다.
지구온난화 대책을 요구하는 학생운동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거시적인 문제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구 밑바닥 중학교 학생들이 부조리를 경험했다는, 매우 미시적인 문제다. 그런데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은 닭꼬치의 닭고기와 꼬치처럼 항상 연결되어야 한다. (고기 덩어리는 미시적인 것, 고기를 꿰뚫는 커다랗고 기다란 꼬치는 거시적인 것이라고 가정하면 말이다.)
그런고로 내 주변에 떨어진 닭고기를 한 조각씩 주워 보겠다. “우리 학교는 내일 시위에 참가하는 걸 허락하지 않겠대.”
학생 시위 전날, 아들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아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D 중학교와 V 중학교는 하프 타임이 시작되기 전날이니 오전 11시에 수업을 마쳐서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할 수 있게끔 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네 중학교는 평소대로 오후 3시까지 수업을 한다는 것이다.
“또 어느 학교가 시위 참가를 허락했어?”
“사립학교는 대체로 허락했고, 공립학교 중에는 H 중학교도 있어.”
아들의 말을 듣고 바로 깨달았다. 그 중학교들은 모두 학교 랭킹 상위에 자리한, 이른바 ‘우수학교’들이었다.
“상위권 공립학교나 사립학교 같은 중산층 학교는 교사들도 의식 수준이 높아서 녹색당 지지자가 많으니까 교사가 인솔해서 시위에 데려가는 거 아냐? 정치적 ‘그루밍’ 같은 거야.”
배우자가 시니컬한 농담을 내뱉었다.
‘그루밍’에는 여러 뜻이 있지만, 소아성애자가 성적 행위를 하기 위해서 인터넷 채팅 등을 이용해 어린아이를 포섭하는 행위를 뜻하기도 한다. 배우자는 교사들이 학생들을 시위에 데려가서 자신이 지지하는 녹색당의 정치 이념으로 물들이려는 게 아니냐고 빈정거린 것이다.
“그보다 애초에 운동을 시작한 아이는 ‘학교 파업’을 주장했잖아. 그런데 예의 바르게 선생님을 따라서 시위에 참가한다니,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내가 말하자 아들이 답했다.
“우리 학교에도 환경문제에 열심인 선생님은 많아. 하지만 교장 선생님이랑 학년주임 등이 회의를 해서 평소처럼 수업하기로 결정했대.”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결국 선생님들이 우리를 믿지 않은 거라고 생각해. 오전에 수업을 마치면 우리 학교 애들은 대부분 시위에 참가하지 않고 거리에 놀러 나가서 쓸데없는 짓이나 할 테고 괜히 문제라도 일으키면 난처해지니까 평소처럼 수업을 하자고 결정한 거야.”
안 봐도 뻔하다는 얼굴로 아들이 말했다.
밑바닥에 있던 중학교의 순위를 조금이라도 위로 올리기 위해 열의를 품고 학교를 운영하는 교장이 내린 결정이니, 아들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로 학교의 나쁜 평판이 퍼지기라도 했다가는 교장의 계획이 후퇴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깊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나는 아들네 학교의 교사 중 환경문제에 열성을 보이는 녹색당 지지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외려 가난한 지역의 학교일수록 정치적 이념이 좌측으로 치우친 교육자들이 많이 모인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내심 학교에서 일찍 거리로 나간 학생들이 싸움이나 절도 등 문제를 일으키면 지구온난화 대책을 요구하는 진지한 학생 시위에 먹칠을 하게 될지 모르니 그건 막자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해서 언론이 보도한 ‘지구온난화 대책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대적인 시위’에 참가하지 못한 아이들이 생겨났다. 누군가는 애초부터 ‘학교 파업’을 주장한 운동이니 시위에 참가하고 싶으면 자발적으로 학교를 땡땡이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국의 빈곤층 아이들에게는 그럴 수조차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
시위 당일 아침, “시위에 참가하고 싶으면 그래도 돼.”라고 아들에게 말했지만, 아이는 여느 때처럼 등교했다가 모든 수업에 출석하고 집으로 왔다.
“왜 시위에 가지 않았어?”
내가 묻자 아들이 답했다.
“엄마랑 아빠한테 벌금을 물릴 거 아냐.”
영국에서는 관공서가 인정하지 않는 이유로 아이를 결석시킬 경우 부모가 지방자치단체에 벌금을 내야만 한다. 부모 양쪽에 모두 벌금을 부과하는데, 각자에게 60파운드약 9만 원씩 청구한다. 21일 이상 벌금을 내지 않으면 한 명당 120파운드로 벌금이 상향되며, 그보다 오래 내지 않고 방치하면 벌금이 최대 2,500파운드약 380만 원까지 치솟고 최장 3개월의 금고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
봄 방학이나 여름 방학 같은 성수기에는 여행 경비와 숙박비가 비싸다며 학기 중에 아이를 데리고 휴가를 가려 하는 부모들이 있는데, 그러지 못하게 막으려고 만들어진 벌칙이다. 브라이턴에도 ‘학교 결석 벌금’이 있으며 지자체의 홈페이지에 다음처럼 규정되어 있다.
[벌금 부과의 사례]
다음과 같이 아이의 출석에 이상이 생길 경우 벌금을 부과합니다.
★ 학기 중에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간다.
★ 아이의 의사로 학교에 가지 않는다. 이는 ‘거짓된 핑계’로 간주한다.
★ 6주 사이에 6회 (오전 수업 및 오후 수업을 합쳐서 6회) 이상 아이가 출결을 확인한 뒤에 지각한다.
★ 아이가 한 학기에 사흘 이상 (오전 수업 및 오후 수업을 합쳐서 6회 이상) 결석한다.
유럽 대륙에 사는 친구에게 결석 벌금에 대해 이야기하자 “거짓말이지?”라며 할 말을 잃기도 했다. 이런 제도에 힘겨워하는 사람은 당연히 가난한 부모다. 그래서 부유하지 않은 가정의 아이들은 늘 이 벌칙에 대해 걱정한다.
“다들 자기 의사로 시위에 참가하면 ‘거짓된 핑계’라서 부모님이 벌금을 내야 한다고 했어. 그래서 시위에 참가하고 싶지만 참은 애들이 많아. 나만 그런 게 아냐.”
아들이 말했다.
형형색색 플래카드를 들고 “기후 변동보다 제도 개혁을!” “개혁이 필요해! 지금이야말로 제도 개혁을!”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즐거운 듯이 행진하는 학생 시위대의 모습을, 아들은 거실에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저녁 뉴스로 보았다.
거시적인 뉴스는 땅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진 닭꼬치의 고기 조각 따위는 절대로 전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머지않은 미래다
*이 글은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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