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비정상, 럭키와 포조는 정상이다.
누군지도 모르고, 오늘도 내일도 오지 않는 고도는 영원히 알 수 없고 결코 나타나지도 않을 비존재다.
럭키는 주인 포조의 바구니와 가방을 들고 다니는 짐꾼이다. 포조는 럭키를 밧줄로 묶고, 채찍을 휘두르며 호통을 친다. ‘더 빨리!’
인간은 그렇게 살아왔다. 지배하고 지배당한다. 지배 계급이 있고 지배당하는 사람들이 있다.(지배란 단어가 다소 거북하다면, "상당한 지휘⋅감독" 같은 노동법적 용어로 바꾸면 된다) 5,000년 전 이집트 문명이나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나 지배와 계급으로 '구별짓기'되는 인간 삶의 본질이 달라질 게 있는가.
지배와 계급 구조 속에서 인간은 무엇이든 더 축적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영유 보내고 학원 보내고 의대 보내고. 전세에서 자가로 서울로 상급지로 더 넓은 평수로.
개인을 기업으로 바꾸면 내년 매출액과 영업이익을 늘리는 것이 될 것이고, 국가로 바꾸면 세수와 GDP를 늘리는 것이 된다. 이 모든 발버둥 끝에 무엇이 있냐고? 알게 뭔가. 일단 더 쌓고,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나온다. 그들은 딱히 어디를 갈 생각을 안 하고, 다 죽어가는 나무 한 그루 주위를 맴돈다. 그리고 누군지도 모를 고도를 하릴없이 기다린다.
두 명의 이상한 사람들은 두 명의 보통 사람들이 펼치는 활극을 굉장히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하지만 이틀 날 눈과 귀가 먼 상태로 다시 나타난 럭키와 포조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와의 만남을 전혀 기억조차 못 한다. 그리고 다시 갈 길을 간다. 밧줄을 묶고 채찍을 휘두르며 무거운 바구니와 가방을 짊어진 채.
챗바퀴처럼 그저 달려야 존속이 가능한 인간 사회에서 사회 시스템을 벗어나 있는 이상한 사람들은 그저 눈을 감아야 하는 허상이고, 귀를 닫아야 하는 소음일 뿐이다. 이상한 사람들은 인간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이 신봉하는 그 어떤 가치도 창출하지 못한다.
나타나지 않는 고도. 절망에 빠진 이상한 사람들은 나무에 목을 매달자고 한다. 하지만 자살을 위해 주섬주섬 꺼낸 에스트라공의 바지 끈은 그대로 끊어지고 만다. 그렇게 삶에 대해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희망인 죽음에 대한 희망도 끊어진다. 그들은 내일도 고도가 안 오면 그때 목을 매자고 서로를 다독거린다. 하지만 그들은 내일도 무대에 우두커니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두고 ‘당신의 고도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다. 고도는 ‘알 수 없음’과 ‘존재하지 않음’이다. 미지와 부존재를 굳이 알아내려 하고, 있게 만들려는 인간의 안간힘이 세상의 부조리를 강화시킨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비극인가? 작품 후반부 절망에 빠진 블라디미르는 독백한다.
무덤 위에 걸터앉아 간신히 태어나도, 무덤 아래선 계속 우릴 잡아끈다.
우리에게 남은 건 늙어가는 시간 뿐, 허공 속엔 통곡만 가득하구나.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
우리, 인간의 귀를 틀어막는 ‘습관’은 삶의 태도이자 개인의 습성이고 타인의 시선이자 사회의 기대이며, 역사를 지탱해 온 권위와 체계이다. 어느 날 ‘내가 왜 여왕을 위해 살고 있지?!’라고 각성한 일개미가 있다고 치자. 군체를 벗어나 개미굴 밖으로 나온 개미에게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는 위험과 우연으로 가득 찬 바깥세상을 둘러보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본 다음, 다시 개미굴 안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결정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는다.
큰 키에 형형한 눈빛, 날카로운 음색의 박근형 배우는 하늘을 바라보는 블라디미르 역에 잘 어울렸다.
사무엘 베케트는 생전 이 작품에 여성 배우의 출연을 반대했다고는 전해지지만, 박정자 배우의 연기를 보면 그 생각을 바꿨을 것 같다. 인간 삶은 변하지 않더라도, 연극은 매번 매 순간이 새롭게 변화하는 무대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