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과 행동에 큰 변화를 준 사건'이라는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
성적이 떨어지는 것보다
누군가를 웃기지 못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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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환경미화부장, 오락부장 같은
엔터테이닝을 주로 담당해 온 학생이었다.
그렇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넌 웃기고 특이해서
광고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큰 인과관계는 없어 보이지만 그러한 말들이 꽤나 울림 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렇게 아주 어렴풋이
광고라는 낭만의 씨앗을
가슴속에 품어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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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을 틔우다
하고 싶은 것으로만
남을 것 같았던 나의 씨앗이
새싹을 틔우는 일이 생겼다.
그 이야기를 슬슬 풀어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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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이 많았던 나에게
대학교 시절은 호기심의 실체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적기였다.
꼭 해보고 싶었던 미팅도 해보고,
노래는 잘 못하지만 깡다구 하나로 뮤지컬 무대에도 서볼 수 있었고, 제목만으로도 구미가 당기는 수업들로 시간표를 가득 채웠던 기억이 난다.
학점에 크게 구애받는 학생은 아니었던지라
전공과는 크게 상관없는 수업으로 흥미를 채워갔다.
(ex. 부자에 대한 욕망을 키워준 부자학개론,
당시 누구나 꿈꿨던 연애를 실습으로 해볼 수 있는 성과 결혼이라는 수업
한 시간 동안 논제를 두고 시원하게 찬반으로 떠들 수 있는 모의국회 수업,
사회학 관점으로 냉철하게 분석해야 하지만 실상은
매번 눈물바다였던 영화와 사회학 등
전공 수업보다는 교양 수업이 내 시간표의 팔 할을 차지했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 말
뒤늦게 알게 된 대학생의 특권인 외부 동아리 활동에 눈이 트여, 관심분야의 외부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우연히 'PT 동아리'에 들어가게 된다.
왜 PT 동아리였을까?
PT, 프레젠테이션..
사실 전공과목 특성상 조발표가 많았고,
재수를 해서 한 살 많다는 이유로
조장과 발표자를 도맡아 했다.
고백하자면,
대학교 초창기 때 발표는 내게 두려움이었다.
불타는 고구마처럼 얼굴이 붉어지고
스위스 양 떼 못지않은 음메- 바이브레이션으로
발표를 간신히 마치고 자리에 돌아오면
고개를 푹 숙이며 열을 식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순간을 끝으로 프레젠테이션과
영원히 인연을 끊지 않았다는 것.
왕언니 노릇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다져진 책임감 덕분이랄까.
함께 만들어간 발표 자료를
어떻게든 잘 전달하기 위해,
떨리는 목소리와, 불타는 얼굴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해냈고,
왕언니라는 이유로 지속되는 발표자 역할을
어느순간부터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언니 이제 긴장도 전혀 안 하는데 올~"
이라는 피드백을 점차 듣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어쩌면..
우연이 아니고
왕언니 포지셔닝이 결정되었던 순간부터
난 'PT 동아리'에 들어갈 운명이었나 보다.
새싹에서 연두빛깔의 꿈이 자라나다.
PT 동아리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15명 정도 한기수로 3개월을 매주 함께 했고,
프레젠테이션 스킬을 강의를 해주는
대표님이 따로 있었는데
스킬뿐만 아니라 매주 주제를 가지고
경쟁피티까지 치열하게 해냈었다.
PT가 드넓은 분야에서 도구로 쓰이는 만큼
정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다 보니
대학교 수업보다 더 흥미롭고 진하게 임했던 것 같다.
동아리 활동이 무르익어갈 때쯤
외부 동아리들이 연합하여
PT 페스티벌이라는 큰 경합을 펼치게 되었다.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 특성상
모든 분야에 4대 천왕이 존재하는 것처럼
당시에 PT로 유명했던 동아리 4곳의 연합으로
PT 경연대회를 열었고,
그 주제는 '프레젠테이션'이었다.
PT 동아리 네 곳이 경합을 펼치는 만큼
뻔하지 않게 압도하자는 것을 목표로
같은 조였던 선배, 동기와 함께 밤을 태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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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아바타라는 영화가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4D 영화가 처음으로 개봉되었던 시기였다.
아바타가 하늘을 날 땐 극장에서 풀내음이 나고
물웅덩이를 거칠게 달릴 때는
의자에서 물이 나오기도 했다.
이를 PT에 접목시키자는
누군가의 아이디어가 단초가 되어
우리는 '후각 PT'라는 주제로
대회 준비를 시작했다.
보통 PT는 시각화된 자료를 사용하거나
효과음으로 청각을 자극했다면,
기존엔 PT때 사용하지 않았던
공감각적 감각을 활용하여 새로움을 주고자 했다.
숲이 나오는 화면에서는
PT 경연장 전체에 숲향이 솔솔 피어나게 하여
마치 숲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끔 말이다.
(경연장 뒤 에어컨 앞에서 숲향이 전체에 스며들도록
힘차게 인센스를 흔들어주던 친구들에게 정말 고마웠던.. 기억이!)
운이 좋게도
선배들과 동기들의 피땀눈물이 들어간 이 내용의
기획서를 가지고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졌고,
무대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을 때
몇백 명의 관객들이 나의 손집,
애드리브에 웃아주던 그 표정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동료들 덕분에 1위를 거머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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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웃긴 친구 역할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어렸을 적 큰 성취를 이룬 경험이 크게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살면서 큰 성취감을 처음으로 느껴보았고,
이 성취감은 내가 마음에 품고만 있던 씨앗에
물을 흥건하게 스며들게 하여
연둣빛 새싹이 틜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그동안
마음에만 품고 있었던,
하고 싶어했던,
‘광고'라는 것을 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내 에너지를 쏟아내었다.
(사회복지학과에서 광고로 전향하기 위해
광고 동아리, KOBACOO IAA 교육, 스터디 등
나름의 퀀텀점프를 위해 노력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광고 업계에서
일개미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사실 이렇게 꽤나
자세하게
변화를 마음먹은 순간을
기록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1
나는 작은 성취감이 동력이 되어
도전의식과 에너지를 불태우는 사람이란 것을
잊지 않고 나중에 꺼내보기 위함이고,
#2
좋아했던 일이 좋아지지 않는 권태의 순간
다시 한번 이 첫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내 생각과 행동에
큰 변화를 준 사건'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
#작은 성취감
#나를 이끌어주는 동력
<PT 페스티벌 당시 사진 한 장 투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