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양현 Jan 13. 2019

고통스러운 식사와 수용소 생활

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르포르타주

고통스러운 나날들

석 달이 지나고 넉 달이 되니 늑골은 적나라하게 불거졌다. 마치 뼈로만 걸어 다니는 인간 같다. 어쩌다 수용소 밖의 작업을 할 일이 생겼다. 굶주린 우리들은 밭에 김을 매는 시늉을 하지만, 뿌리고 잎이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죄다 입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밭을 완전히 망쳐놓은 것이다. 그 후 그 작업은 중지되었다.


하루는 장작을 패라는 명령을 받고 아름드리 나무뿌리를 모아 놓은 광장으로 갔다. 그것은 차마 먹을 수가 없는 나무다. 하지만 몇 달 동안 배를 굶주린 우리는 그것도 먹을 것으로 보였다. 이러니 장작을 패라는 명령이 잘 수행될 리가 없다. 한참 후 수용소 소장이라는 중위가 관사에서 나왔다. 곧 터질 듯 뚱뚱한 배를 밴드로 잘 매고 지휘봉을 들며 말한다.

“너희들 코리언이지. 일은 안 하고 무슨 꾀만 파고 있는 거야. 이런 놈들이 포로더러 일 시키고 학대하고!”

우리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저 새끼. 말하는 것 봐. 저것들이 일본인보다 우리를 더 미천하게 보는 거야.”

“그래. 영국하고 일본하고는 통하는 점이 많잖아. 같은 섬나라고 식민지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언제 포로한테 일하라고 재촉했나.”

싱가포르 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전범들(https://ww2db.com에서 인용)

“맞아. 경례 같은 걸 안 한다고 좀 심하게 군 사람은 있긴 해도.”

“그게 몇 사람이 되나. 그런 사람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걸.”

“그래. 정말 몇 사람 때문이지. 따귀 하나 때리다 잘못해서 자빠져 죽은 놈도 있잖아.”

“그놈 죽인 애는 안 보인다.”

“그 애는 진작 없어졌지.”

“어디로 갔어?”

“자바에 있을 때 독립군 쪽으로 넘어가 버렸지.”

“참 잘 도망쳤네.”

“그런 애들 찾느라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거잖아.”

“야 그런데 그 의무 담당하던 애 있지.”

의무담당을 하던 애라면 나도 기억이 났다.

그 애가 큰일이 났단다. 요새 조사받으러 날마다 나가는데
그 애한테 막 덮어 씌우더래

“그 애가 큰일이 났단다. 요새 조사받으러 날마다 나가는데 그 애한테 막 덮어 씌우더래.”

“그 애가 무슨 잘못 있다고. 아픈 자 있으면 있는 약 주고 그랬을 뿐인데.”

“글쎄. 약도 잘 안 주고 치료도 잘 안 해주고 했다 그랬대.”

“참내, 약이 있어야 주지. 그리고 아프면 환자 수용소로 보내면 될 것 아냐.”

“그러게 말이야. 상부의 잘못이지. 우리에게 무슨 권한이 있냐.”

“○○도 포로가 죽은 사건하고 관련이 있다고 데려갔어.”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없고 이름이 아니 성이 같은 모양이지. 그래서 그가 요새 정신이 돌아가버렸다더라. 헛소리만 하고.”

“아이고 불쌍하다. 나도 같은 이름이 나오면 어떡하지?”

“이름이 같고 경력이 같으면 꼼짝없이 당하는 모양이야. 사람이 달라도.”

“경력이 아주 엉뚱하게 다르면 모르지만, 근무지가 조금 다르면 거짓말한다고 마구 뒤집어씌운대.”

“하나 죽었으면 우린 셋이나 사형을 시킬 모양이야”

“그나저나 그 애 ○○는 불쌍하다. 어떻게 머리가 돌아버렸대.”

“남의 일이 아니다. 언제 내 앞에 닥칠지 모를 일이야. 그 애는 감방에서 밤이면 별이 보인다 하고 하늘에 대고 손가락질하고 그런가 봐. 헛소리만 하고.”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는 전범기소자들 (임페리얼전쟁박물관https://www.iwm.org.uk에서 인용)


돼지보다 못한 팔자

넉 달, 다섯 달이 지나는 동안 우리의 생명줄인 식사는 전혀 변함이 없다. 우리가 줄을 지어 식사 시간에 식당에 들어가면 비스킷 두 장과 1/3조각이 정확하게 배분되어 있다. 그러나 1/3조각은 조금씩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한쪽부터 차근차근 자리를 밀려 앉기 시작하는데 조금 큰 조각이 있던 자리에서 작은 조각의 자리로 밀려가면 그 때의 식사는 매우 섭섭하다. 한 끼니의 식사인 옥수수는 국물에 옥수수가 가라앉아 내용물은 보이지도 않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어느 날 우리는 사무실에 갔다가 오는 길에 돼지 한 마리를 보았다. 안에 있는 경비병들이 그들의 먹잇감으로 키운 돼지다. 돼지는 시원한 시멘트 바닥에서 배불리 먹고 잠자고 있었다. 그 곁에는 돼지감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경비병의 눈만 없으면 그 감자는 순식간에 없어질 것이다. 우리 중 하나가 말했다.

“저 돼지 팔자 좋네. 죽을 날까지 배불리 먹고.”

또 한 명이 말한다.

“지금이라도 풀려난다면 그래도 내 팔자가 난 건데...”

“이대로 가다 끝까지 못 풀려나면 어쩌지?”

“돼지가 낫겠다. 나도 돼지 같이 내일 일은 걱정 안 하고 산다면 좋겠다.”

“네 말이 옳다. 우리는 언제쯤 결말이 날까?”


각기병에 걸리지 않는 이유

한 일도 없지만 결말도 나지 않은 나날이 계속된다. 낮이면 건물 벽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것이 상책이다. 앉았다 일어서면 머리에서 피가 주르륵 내려오는 탓인지 머리에서 한기가 생겨 찬물을 끼얹은 것 같다. 만약에 시멘트 바닥에 넘어지는 날이면 그대로 빈혈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전에 이곳 싱가포르에 몇 차례 출장을 온 일이 있는데 2주일쯤 지나면 각기병에 걸려 장딴지가 무겁고 걷기가 곤란했다. 그때의 식사는 백미에 건조야채 국물이었다. 원인은 비타민 B가 부족한 탓이다. 그런데 지금은 각기병에 걸리지 않는다. 생명 유지조차 어려워 보이는 식사에 비타민이 있단 말인가? 참 희한한 일이다.


더불어 한 가지 큰 은총이 있다. 여기는 열대지방이지만 창이의 언덕은 항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겨울이 닥쳐올 염려가 없다. 감방 안에서 시멘트 바닥에 담요 한 장 깔고 누우면 항상 쾌적하다. 청소가 잘되고 나무 하나 없는 탓인지 모기 한 마리도 없다.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북국의 땅에서 이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나는 이미 죽고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