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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May 31. 2021

연재를 마치며

외할아버지의 글은 수용소 생활을 끝으로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미완성인 채로 끝나버린 글인 것이죠. 미완성의 이유에 대해, 외할아버지로서는 끔찍했던 수용소 생활을 계속 떠올리며 글을 한자한자 적어나가는 것이 매우 고통스러웠기 때문일거라 지레 추측만 해봅니다. 혹은 생업으로 인해 글의 마무리를 하는 것을 버거워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둘 다 아니라면, 정말로 당신께서는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던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표현처럼 그 시간을 어딘가 놔두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외할아버지께서는 그 시간을 잃어버린 채로 놔두고 싶은 심정이었을까요?     


당시 외할아버지는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한국으로 곧바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일본정부는 패망 직후 해외 각지에 흩어진 조선인 출신 군인, 강제징용노무자, 위안부 등에 대해 전수조사를 실시해 유수명부라는 것을 작성했는데요. 남양남방군(南洋南方軍) 마래(馬來) 조와(爪哇) 노로수용소(俘虜収容所) 유수명부 (留守名簿) 즉 동남아시아군 소속 말레이, 자바 포로수용소 소속 군속에 대한 명부 라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국가기록원에 가서 해당자료를 살펴본 결과 할아버지의 이름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명부 빨간색 상자 안에 있는 일본식 이름 야마모토 에이우(山本榮宇)이 외할아버지입니다.

연합군의 일원이자 인도네시아의 원래 식민지배국이었던 네달란드군은 일본의 패망 직후 네달란드를 다시 점령했고, 당시 조선인민회라는 단체를 결속해 움직이던 조선인 군속들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시했습니다. 결국 네덜란드군은 군속들을 테러리스트 단체로서의 위험성이 있다고 간주해 전원을 구금시켜 조사를 받게 하였습니다. 대부분이 석방되어 고국행 배를 탔지만 그 중 일부는 실제로 기소되어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외할아버지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 후 외할아버지는 자카르타 인근 치파낭 형무소에서 약 1년 7개월 가량을 복역했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외할아버지는 B,C급 전범으로 형을 언도받고 감옥에서 형을 산 148명 B,C급 전범의 명부에서 빠져 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두가지로 추측해봅니다. 첫째 외할아버지가 전범용의자로 기소되어 연합군 측의 조사를 1년 넘게 받다가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을 가능성입니다. 둘째, 전범의 명부에 실수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명부에 외할아버지의 이름이 없는 이유는 앞으로 제가 찾아야 할 숙제일 것입니다.     


외할아버지는 치파낭 형무소에서 형을 탈고 1947년 3월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현재는 자카르타로 이름이 바뀜)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아래의 명부는 네달란드 국립 아카이브에서 보관 중인 치파낭 형무소에 해방되어 배를 타고 한국으로 떠난 조선인 승선명부 137인이 적힌 문서입니다. 외할아버지는 137인 중 132번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32번, 빨간색 상자에 있는 이름이 외할아버지입니다.


이모할머니들은 외할아버지가 전쟁에서 죽었다고 생각하셨다가 앙상하게 야윈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고향에 돌아오신 것을 보고 깜짝 놀라셨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신 외할아버지는 포로감시원 체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주저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포로감시원 모집공고에 응시해 합격 후 참전을 했던 상황, 그리고 전범용의자가 되어 복역을 했던 과거가 본인에게는 잊고 싶은 괴로운 기억이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좋은 전쟁이란 없다고 벤저민 프랭클린은 말했습니다. 전쟁은 모든 이를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것은 한치의 틀림없는 자명한 진리입니다. 저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외할아버지를 비롯한 조선인 모두 전쟁이 낳은 비극의 희생자라고 여기지만 포로감시원들에게 감시와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했던 연합군 측 포로들 역시 전쟁의 큰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독일 나치군에 붙잡힌 연합군 포로의 사망률은 4% 미만이었지만 일본군 측의 연합군 포로의 경우 사망률이 무려 30% 가까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었던 연합군 포로들은 도로나 비행장을 만드는 강제노역에 수시로 동원되었고 급식이 원활하지 못해 영양실조나 질병으로 죽는 이들이 숱하게 발생했습니다. 당시의 사진들을 보면 일본군 포로수용소의 연합군 포로 대부분이 피골이 상접한 기아수준의 영양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국의 싱가포르 탈환후 1945년10월  창이수용소 정문에서 쏟아져나오는 연합군 포로들 (State Library of Victora에서 발췌)

일본군은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제네바협정을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게 가르친 적이 없으며 그렇기에 조선인 포로감시원들 역시 인권의 무거운 의미에 대해 잘 몰랐을 것입니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고 음습한 밀림과 작렬하는 태양 아래 적도의 이질적인 환경,  문명인으로 자부하던 서양인과 미개인으로 취급받는 동양인 간의 미묘한 우월관계, 그리고 무자비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하는 전쟁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가혹행위를 하는 포로감시원과 가혹행위를 불합리하게 받아들이게 된 포로들이 한 곳에 있었습니다. 


소수 위정자들의 결정으로 수행된 전쟁은 수많은 무명의 개인들에게 많은 고통과 피해를 겪게 하였습니다. 지금이라면 서로 자유롭게 어울리며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을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상대에게 가혹행위를 하거나 그 가혹행위를 받아내야 했습니다.    


이제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스무살의 청춘, 꿈많고 패기 넘치던 청년이었을 외할아버지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 봅니다. 이십대 어느 젊은이의 꿈을 좌절시킨 그 엄혹하고 난폭한 시대를 부질없이 원망해봅니다. 모두를 희생시킨 그 시대는 이 땅에 다시는 재현되지 않아야 할 어두운 역사입니다. 오랜만에 외삼촌 댁에 들려서 외삼촌과 함께, 한동안 잊고 있었던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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