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미는 ‘지상 최대의 쇼’라는 영화에서 나온 생생한 기차 충돌 장면을 보고 이를 기억에서 지우지 못한다. 심지어는 꿈에서까지 그에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방식으로 이 공포를 극복하려 한다. 자신이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을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를 드는 것이었다. 그 장면이 무섭고 공포스러웠음에도 재연하려 한 이유는 자신이 느낀 그 감정을 통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공포를 통제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영원히 볼 수 있는, 즉,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통제에 성공하는 경험을 하게 된 그는 카메라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에게 그렇게 쉽게 권력을 내주지 않는다. 어쩌면 삶이 내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새미는 자신이 촬영한 필름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엄마의 외도를 알게 된다. 새미는 필름을 잘라내어 그 장면을 없애보지만 삶이라는 영화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친구들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영화를 찍던 새미는 주연을 맡은 친구에게 어떤 식으로 연기할지 지시한다. 하지만 컷을 외친 후에도 주연배우는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촬영지를 이탈한다. 영화는 물론이고 삶마저 그에게 통제권을 쉽사리 내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영화를 포기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영화는 삶을 바꿀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던 것일까?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고 부모님은 결국 이혼을 결정한 상황 속에서 영화는 그에게 다시 생각해보라고 손을 내민다. 그의 여자친구는 학교 소풍에서 영상을 찍어줄 사람이 필요하여 이에 지원해보라고 부추긴다. 그저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촬영을 하게 된 그는 더이상 상황을 만드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영화마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그저 무엇을 담아야 할 지, 어디를 바라 보아야 할 지에 집중한다. 그 영화는 자신을 괴롭혀 학교 생활을 지옥으로 만드는 동급 친구를 영웅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 친구는 새미의 영화를 보고 혼란에 빠진다.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이혼하고 대학에 가 원치 않는 공부를 하고 있는데다가, 영화계에서 일하고 싶어 아무리 지원서를 내도 어떤 답장도 오지 않아 공황에 빠져 있던 그에게 CBS에서 연락이 온다. 그는 그곳에서 존 포드라는 거장 감독을 만나게 된다. 감독은 새미에게 자신의 사무실에 걸려 있는 두 개의 그림을 통해 수평선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그 상황에 대한 흥미가 달라진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결국 나쁜 친구를 영웅으로 보이게 하는 것도, 그림을 흥미롭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도 모두 상황 그 자체가 아닌 관점의 문제였다. 인간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자체를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수는 있다. 이 영화가 수많은 비극이 그대로인 채 끝남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딩으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결국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비극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 비극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스필버그는 존 포드의 말에 따라,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지켜보고 있는 카메라를 조정해 지평선을 프레임 아래로 낮춘다. 그렇게 어린 새미는 '흥미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마주하게 될 크고 작은 비극 앞에 서 있다. 그렇지만 영화가 있기에 다행이다. 영화는 비극을 박제해 끊임없이 상영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어떻게 하면 다시 '기차가 충돌하지 않을지'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우리의 삶에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