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에는 감정에 대한 가장 적은 정보가 담겨 있다. 표정을 보지 않고 오로지 뒷모습만으로 누군가의 감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심한 응시가 필요하다. 팔과 다리는 어떻게 움직이고 머리는 어떻게 흔들리는지, 어깨가 들썩이지는 않는지 하는 등의 것들.
인간에게 '등'은 어찌 보면 가장 취약한 곳이다. 무언가를 등지는 순간 그것은 미지의 영역이 된다. 그래서, 카메라는 캘럼을 헤아리고 싶어서,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어서 그의 뒷모습을 폭력 없이 응시한다.
어쩌면 영화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뒷모습을 보는 데에 있을 수도 있다. 독립된 하나의 시각으로서 볼 수 없던 것, 느낄 수 없던 것 또는 망각한 것을 보게 해주는 힘.
캘럼은 소피의 등에 '애프터썬'(햇볕에 탄 피부에 바르는 크림)을 발라준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등에는 애프터썬을 발라주지 않는다. 그는 등을 훤히 내놓고 잠에 들거나 태닝을 한다. 그렇게 계속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계속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타들어 간다. 우리는 그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어떤 기분일지 예상은 할 수 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자신의 부모의 기분을 무섭도록 빠르게 알아채는 것처럼 영화는 소피의 시선으로 우리를 데려가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그가 마치 쓰러진 듯 누워자는 모습, 난관에 올라가 서 있는 위태한 모습, 벌거 벗은 채 우는 뒷모습, 자신의 얼굴이 비친 거울에 치약을 뱉는 모습, 칠흙같이 어두운 바다로 걸어가 사라지는 모습, 그리고 끝내 소피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미래를 예측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관객에 정보를 주려기보다는 그 모든 것을 거두절미하고 한 명의 감정을 보듬는데에 사력을 가한다. 그리고 움직임을 최소화한다. 왜냐하면 카메라의 움직임은 폭력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시선의 권력을 쥐고 인간에게 주어진 망각이라는 축복마저 빼앗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듯 사려 깊은 태도로 하나의 의식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어린 소피가 카메라를 내려 놓는 순간이 바로 그런 태도일 것이다. 어린 소피는 캘럼이 슬픈 과거를 말할 때 카메라를 끈다. 소피의 카메라는 피사체가 원치 않는 순간에 폭력성을 거두었다. 그렇게 피사체와 함께 영화가 만들어진다.
매우 적은 비중임에도 어른 소피가 등장했어야 하는 이유는 그녀가 이제 과거라는 이름의 영화에서 벗어난 현재의 관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 죽어버린 시간을, 죽었음에도 자신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는 시간을, 그 헤아릴 수 없었던 누군가의 과거를 다시 상영한다. 여전히 과거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그를 끌어 안는다. 그리고 그에게도 시선의 권력을 제공한다. 그렇게 소피의 해맑은 작별 인사는 엔딩 시퀀스에 자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