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게 관리란 무엇이단 말이냐
최근 TV채널을 돌리다 보게 된 고현정의 미모는 가히 경이로웠다. 50대라고는 믿기지 않는 주름 없는 피부와 잡티하나 없는 도자기 같은 얼굴은 그녀가 데뷔했던 때보다도 오히려 아름다워 보였다.
한 연예채널에선 김혜수가 보톡스 시술로 멍이 크게 들어 촬영에 난황을 겪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화면 속에 그녀들은 내가 어렸을 때 떠올렸던 50대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녀들의 변함없는 미모에 감탄과 동시에 나는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내가 생각했던 50대는 하이힐과 몸에 딱 끼는 옷에서 해방되어 주름을 감추는 메이크업도 필요 없이 눈가의 주름을 열정적으로 살아온 젊은 시절의 훈장같이 여기는 그런 편안한 모습의 중년이었다. 여성호르몬의 부재로 급격히 변해가는 체형에도 남편과 서로 옆구리살을 꼬집고 탄력 잃은 뱃살을 주물럭거리며 내일부터 다이어트!라고 외치는 삶. 경보 같은 빠른 걸음으로 산책을 하며 이 나이에 뛰다가는 도가니가 나가니 무리하지 말자 라며 서로 위로하는 삶. 마지못해 부은 얼굴도 예쁘다며 야식 후의 아침의 짜증을 받아주는 것이 중년의 생존방식으로 여기는 삶 정도.
하지만 내가 곧 직면하게 될 50대 여성의 삶은 여전히 세월의 흔적을 붙잡기 위해 관리만이 살길임을 외치고, 20대만이 가능할 것 같은 3대 근력운동을 하며, 필라테스며 골프며 매끈한 몸매를 드러낼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 삶. 세수도 하지 않고 유통기한이 아까워 마지못해 팩을 올리는 삶을 죄악으로 받아들인다.
내가 피부과를 처음 다니기 시작한 때는 바야흐로 10년 전인 37살이었다. 아이들만 상대하던 어학원을 접고 홍보와 투자 업무로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직장으로 제2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자, 나이 들어가는 얼굴에 신경이 쓰이고 관리로 무장된 강남의 또래들이 마치 대한민국의 평균 여성으로 느껴지게 되는 증상이 나타났다. 사춘기 때나 느낀다는 바로 또래집단의 압력을 새삼 느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늦은 귀가에는 화장도 지우지 않고 자다가 화장실로 업혀가거나, 출근하지 않는 날은 세수도 하지 않는 게으름의 최상위층에 있는 나에게 피부과 관리는 마치 책한 장 넘기고 있지 않다가 하루만 눈이 시뻘게지도록 벼락치기를 해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신세계였다. 마치 6개월의 게으름을 쌓아 한 번의 관리로 그 죄책감은 씻겨나가는 느낌. 얼굴이 건조할 때는 수분관리를 하고 잦는 음주자리와 수면부족으로 모공이 늘어난 기분이 들면 레이저 관리를 받은 후 다시 피부과를 가서 적금을 받을 때까지 게으름을 비축했다. 게으름은 쌓으면 쌓을수록 피부관리로 오는 보상은 커졌다.
십 년이 지난 지금,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음에도 여전히 나는 최소한 일 년에 두 번은 피부과를 다닌다. 그때와 다른 점은 인생의 보릿고개를 맞아 빈도수가 줄었다는 점과 그저 광채만 나면 만족스러웠던 시절을 지나 탄력과 리프팅관리로 집중되어 있다는 점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나는 관리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화와 아름다움에 대한 관리가 자기만족이라는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끈을 놓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맞다. 그리고 화면 속에 비친 아름다운 그녀들을 보며 씁쓸함보다 그녀들의 꾸준함에 그저 경외감이 들었을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왜 경외감이 아니라 씁쓸함이 밀려들었냐는 말이다.
십 년간의 그럭저럭 꾸준한 관리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사실 이미 내 모습에 상당 부분 만족하고 살아왔다. 정확히는 생김새에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관리를 꾸준히 하기엔 이미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만 나는 내 몸에 심하게 게으르다. 그것도 아주 게으르다. 미용실은 2년에 한 번 가고 눈썹정리라는 것은 해본 적이 없으며 일할 때를 제외하곤 추리닝으로 모든 생활을 해결한다. 그런 게으름을 감안하면 그저 살이 덜 찌는 체질에 감사하고 나이에 비해 주름이 없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유전으로 잘 흘러주길 바라는 염치없는 기도가 내가 나를 가꿀 수 있는 최선이라고.
화면 속의 그녀들을 보고 나는 마치 아! 그 나이가 돼서도 공부를 해야 한단 말인가 느끼는 수능을 막 치른 고3 같은 기분이 들었단말이다. 선택의 문제이지만 게으름의 최상위에 있는 내가 최소한의 관리를 놓지 못하고 있는 삶은 가끔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선택인지 의문이 든다.
수년 전에 나는 아직 젊고 예쁘니 어서 하루라도 빨리 재혼을 하라는 경우 없는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젊고 예쁘지 않으면 재혼을 하지 못한다는 논리인가? 나는 이 나이에 또다시 FA 시장에 이름을 올린 것인가? 재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전혀 없지만, 유통기한이 임박해 어서 팔아야 하는 우유처럼, 지금이라도 재혼을 할 상대를 찾거나, 그렇지 않으면 쓸쓸하게 늙어가는 노년은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인가.
당시 나는 꽤나 분노해서 내가 너한테 이런 조언을 들을 군번은 아니지 않냐? 이제 내가 니 선배랑 같이 살지 않으니 내가 만만한가 봐?라고 잘하지도 못하는 표독스러움을 드러냈다. 진짜 표독스러웠는지도 의문이지만.
몇 년 후 나는 다시 피부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여전히 아름다운 고현정을 바라보며, 그 후배 놈이 강조했던 ‘하루라도 젊고 예쁠 때‘라는 표현이 나의 상품성을 시사하는 모습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무의식 속에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함이 밀려와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이를 둘 가진 사별한 여성이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젊고 예쁠 때뿐이라는 한계.
언젠가 친구들과, 연애할 때는 말쑥했던 남편이 점점 살이 찌고 못생겨져도 봐줄 수 있지만, 처음부터 그런 남자를 만나 연애하기는 힘들지 않냐 라는 내용으로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따지면 기혼이라는 제도권에서 벗어나있는 나조차도 살이 찌고 못생겨짐을 늦추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생각만 해도 피로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마지못해 피부과 예약을 몇 번을 미루고서야 밀린 숙제를 하는 아이처럼 죽상을 하고 다시 예약을 하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지금까지 평범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더라면 여전히 5시에 일어나 아침 조깅을 하고 주기적으로 피부과를 다니며 자기 관리를 목적으로 한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을 혼자인 지금보다 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당시의 자기만족이라는 관념도 타인의 안정된 인정 속에서, 그 드라마 속 유행어가 되어버린 누군가의 추앙 속에서 싹트는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라는 씁쓸함. 인생사 모든 것이 숙제라고 생각하는 순간 죽도록 하기 싫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 아니더냐 자위를 해보지만, 결국은 나조차도 나를 상품화시키고 있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통기한이 살짝 지난 팩을 얼굴에 씌우고 이런 낙서나 쓰고 있는 삶이다만, 하루에 5분만이라도 타인의 인정이 배제된 순수한 의미의 자기 관리를 해보기로 한다. 결국 혼자 가는 삶이므로. 타인에게서 해방된 자기 관리라는 것을 해보기로. 누구에게서 채워지지 않아도 내가 채워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