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키키처럼 낯선 마을에 정착했다. 어쩌다 교외로 나들이를 갈 때 차창 밖으로 스치던 풍경 중 하나였을 뿐, 이름도 알지 못하던 동네다. 아는 사람이 전무한 이곳은 마치 지금까지 그리던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을 부욱 찢어 버리고 다시 받아 든 새 도화지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나무 덤불 사이에 만들어 놓은 새집같이 초록에 둘러싸인 이 동네에서, 해 보고 싶던 커피숍을 열었다. 실내 디자인도 이름도 내가 만든 그 공간이 나는 그저 좋았다.
여느 커피숍도 그러하듯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낯설던 얼굴들이 익숙해지고, 하루라도 안 보면 궁금해 질만큼 당골들도 생기고, 본 적도 없는 내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도 생겼다. 그녀들이 알려주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준다는 걸.
내가 말을 재미있고 조리 있게 하고, 무엇보다 자기들이 하는 말을 '진짜로' 들어준다고 했다. 그래서 나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하고자 했던 범위를 넘어 하지 않으려 했던 이야기까지 말하게 된다고 했다. 나는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이야기 속으로 잠시 들어가 버리는 것 같다. 그 사람이 느꼈을 희로애락에 감정 이입될 때가 많아서 대화 중간중간 나오는 시의적절한 추임새가 더욱 공감의 메시지로 전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어! 거기까지 정말 괜찮겠어?'라고 묻고 싶을 만큼 깊은 이야기를 공유해 주는 사람들도 있는 걸 보면,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것이 아닌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인가 보다.
또한 나는, 실속 없는 일도 기꺼이 해 낼 수 있는 '열정'이 있다. 내가 바라는 대가라면 그저 '내 마음이 꽉 차오르는' 일이면 된다. '열정 페이'라는 펄떡이는 이름으로 타인의 '열정'을 '착취'하는 사람들도 보긴 했지만, 착취당하는 줄 모른 채 펄떡였던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의 것이고 내 스스로 마음을 채웠으니 괜찮기로 한다. 십 년 전쯤 상담을 하시던 교수님이 내게, '너는 통찰력과 공감능력이 좋아서 상담 공부를 해보면 좋겠다'라고 하셨다. 내 지독히 나쁜 습관 중 하나가 '이미 늦은 때'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십 년 전에도 그 못된 생각이 나를 주저앉혔었다. 어쩌면 내가 만든 그 덫에 걸린 척하며, 하지 않아도 될 합리화로 나이 탓을 한 거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십 년은 흘렀다.
증거 대기 좋아하는 이 세상에, '나는 이런 것을 잘하는 사람이오'라고 내밀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근거 없는 나의 통찰력과 공감능력은 동네 커피숍 안에서, 식어가는 커피 향처럼 사그라들고 마는 것인가 하는 회한의 마음도 있다.
그러나 동네 커피숍이면 어떻고 식어가는 커피 향이면 어떻겠나. 사람이 사람과 만나는 일,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주치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 기억과 사실이 화해할 수만 있다면 어느 곳, 누구와면 어떻겠나... 더 나이가 들수록 나의 통찰은 깊어지고, 공감대는 넓어져서, 내 열정을 쏟을 '실속 없는 일'과 만나고 싶다. 글로는 미처 배우지 못해 가슴으로 먼저 알아 버린 나만의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