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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용담 Jan 21. 2022

세렌디피티 (Serendipity)



일 년 전, 앞뒤 분간 안 하고 무조건 뒤집어쓴 스웨터처럼 뛰어든 스터디 모임이 있었다.

무슨 책으로 무얼 공부하는지조차 따져보지 않고, 그 모임을 주관하는 사람만을 믿고 올라탄 경우였다.

안내된 제목의 책을 주문했고, 대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를 들어 올리면서, 나의 대담한 시도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매우 크고, 매우 두꺼우며, 활자는 엽기적으로 작은 데다가 한국말로 쓰였으나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던 책.

<꼭 읽어야 할 예술이론과 비평 40선>

'도널드 프레지오시'가 40개의 중요 논문 중 부분 발췌한 것들을 모아 놓은 엄청난 책이다...

2020년 12월 20일 줌을 통해 아홉 명이 시작을 했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각자가 만진 부분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의견을 나눴으며, 시원한 답도 없는 추측과 때로는 억측을 동반하며 조금씩 코끼리 형상을 만들어 갔다.

사계절의 시간 동안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나름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앎이 무르익었듯 서로 간의 정 또한 무르익었음은 말로 다할 수 없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긴 여정이 드디어 끝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홉 명이 다섯 명이 된 우리는 오늘 쫑파티를 빙자한 만남을 가졌다.

사방에서 모여들기 좋은 고속터미널역 파미에스테이션에서, 낯선 이들 가운데 서로를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은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여학생 계집애들처럼 키득키득거리며, 아주 맛있다는 태국 음식점에서 국물이 끝내주는 소고기 쌀국수와 솜땀 그리고 태국식 춘권인 뽀삐아를 먹었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를 연발해가며, 쫑쫑 썬 삭힌 매운 고추를 넣은 새콤달콤한 소스에 쿡쿡 찍어 먹는 그 기분이란!

본격적인 수다를 위해 자리를 옮겨, 팥이 얌전히도 올라앉은 우유 빙수와 인절미 구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정말 많이 웃고 떠들었다.

예술이론을 빙자했으나 전혀 예술스럽지 않게, 아주 아줌마스럽게, 매우 본능적으로!

그러나 신기한 건 농담인 듯 진지하며, 누군가 1절을 꺼내 이야기하다 보면 후렴구는 우르르 다 같이 부르게 되는 힘이 있었고,

하나를 휙 던지면 탁 받아 턱 하고 뭔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으며, 저마다의 창고에 내공 몇 보따리쯤은 쌓아놓고 사는 여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웠던 건 그들이 가진 마음의 낮은 문턱인데, 다 풀어헤쳐 나누어 줄 아량과 배포가 그 안에 포진되어 있었다!

내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두 주먹을 힘껏 쥐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마음'이 우리의 대화에 있었다.

몇 시간의 대화 동안 건설적인 계획들도 오고 갔는데, 아마도 그녀들은 올해 오늘 대화의 유형의 전리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 우연한 행운, 뜻밖의 재미,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만난 기쁨.

그녀들은 내게 세렌디피티(Serendipity)이다.

일 년 전 내가 앞뒤 상하좌우를 따지고 들었다면, 내 능력을 폄하하는 습관대로 마음을 접고 말았다면, 매우 두껍고 세밀한 활자의 책에 기가 눌려 주저앉고 말았다면 나는 오늘의 이 기쁨을 알 도리가 없었겠지.

세렌디피티가 만들어 낼 또 다른 세렌디피티를 기대하는 밤.

우리의 우연한 행운은 뜻밖의 재미가 되어,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만나는 큰 기쁨으로 다가올 것을 믿어 보는 밤.

겁 없이 뛰어들었던 내가 기특해지는 밤.

그래서 더욱 내게 기대해 보는 밤, 아름다운 '지금 그리고 여기'의 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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