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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레이 Dec 25. 2017

03. 아구스 아저씨

집주인이었던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아구스(Agus) 아저씨는 중국계 인도네시아 사람이다. 하지만 이름도 중국식 이름이 아니고, 중국말도 아예 하지 못한다. 왜 그러냐고 묻자 껄껄 웃으면서 "그야 우리는 이미 인도네시아 사람이기 때문이지"라 간단히 말한다. 50년 전 중국인 학살 이후 중국말이 아예 금지되었고 아직도 차별받는다는 등의 정치적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는다. 미리 말하지만,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1년 동안 인도네시아 스마랑에 살았을 때, 그는 내가 살던 방의 집주인이었다. 스마랑이란 도시는 자카르타와 달리 아직 개발이 덜 되어 외국인이 많이 없는 도시다. 처음 내가 방을 구하러 그와 만났을 때, 나는 그가 한국인인 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동시에 중국계 특유의 협상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보였다. 결국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과는 달리 내겐 처음부터 가격을 높게 부르지 않고 적정 가격에 좋은 방을 내주었다.   



 그는 키가 조금 작고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 다니지만 날카로운 현실 감각을 가진 사람이다. 나의 가족 이야기는 물어보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좋아했다. 자신이 집 여러 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전에 한국인 사업자가 자신의 집에 들어온 적이 있다는 것과, 한 지역에만 약 200만 달러 정도의 땅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기 아들은 국제학교를 다니며 일본으로 유학을 보낼 예정이라는 말 등이었다. 그러면서 매번 내게 '만약 네가 여기서 비즈니스를 한다면 어떤 걸 해볼 거야?'라고 물어본다. 색다른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난 그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큰일을 보고 휴지가 아니라 물로 닦으니 비데가 어떠냐고 별생각 없이 던져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중국계(화인)들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했을 때부터 쭉 눌러왔던 중국인들로, 3-400년 전부터 온 사람도 있을 정도로 이주 역사가 깊다. 화인들은 무역하기 좋은 해안가 도시에 자리 잡고 배타적인 상권을 만들어 부를 축적했다.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은 이를 싫어했고, 1965년 수하르토가 공산당(PKI)을 뿌리 뽑을 때 많은 화인들이 중국의 마오쩌둥 공산당으로 몰려 학살당한다. 사실 인도네시아 화인들은 주로 자본가였기 때문에 공산당을 누구보다 싫어했을 게 분명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후 1997년엔 반 화교 폭동이 일어나 수천 명이 죽었을 정도로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 질린 많은 화인들이 아예 중국계가 다수인 싱가포르로 이주했거나 적어도 국내 자산을 싱가포르나 기타 해외로 상당수 옮겼다. 이 때문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세금을 거둬들이는 데에 상당히 골치를 썩히며, 자산을 자진 신고하면 조세를 사면해 주겠다고 조코위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했을 정도였는데, 이 기간 동안 은닉된 약 410조 원가량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돈 많은 중국계들이 주로 찾는 식당


 많은 경우 인도네시아 화인들은 국가 정체성이 거의 없다. 식사할 때도 중국계끼리만 가는 식당에서 어울리고 현지인들과 접촉점을 일터로만 한정한다. 외국인을 만나면 인도네시아어를 버리고 영어를 쓴다. 하지만 아구스 아저씨는 달랐다. 그가 구사하는 인도네시아어에는 'ㅏ'를 'ㅝ'로 오므리는 자바 억양이 매우 강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구글 지도에 뜨지 않는 골목 맛집에 데려다 주기도 했고, 밥 먹을 때 손을 사용해 먹으면 현지인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것 등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게 앞으로 영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어로 이야기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조언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이 주로 찾는 식당

 하지만 그도 그렇게 인도네시아인처럼 살고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지만, 무의식적으로 현지인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 해 2015년의 건기는 무척 길었다. 10월이나 11월이 되면 비가 와야 되는데, 12월 말에 이르러도 조금씩밖에 안 왔다. 때문에 물 값이 미친 듯이 올랐는데 세입자들이 펑펑 쓰는 덕에 물이 부족해지자 아구스 아저씨는 경멸하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돈도 없으면서 낭비벽이 매우 심하다. 이렇게 물이 부족한 때인데도 꼭 보면 아무 이유 없이 외출할 때도 물을 틀고 나간다. 집에 들어올 때 시원하라고 에어컨을 끄지 않고 나간다. 게으르고. 지들 돈이 아니니까."       

 이럴 때면 자기는 인도네시아 사람이 아닌 예외적인 중국계 후손이다. 50년 인생을 다수의 틈바구니에서 살면서 성공한 사업가로 살아남기 위해 처세술을 익혔지만, 그런 베테랑이라도 본심이 처세술을 뚫고 나올 때가 있었다.

 결국 물 값이 너무 오르자 산에서 퍼온 깨끗한 계곡물을 쓰는 대신 뒷마당에 지하수를 파기 시작했는데 필터 없이 그냥 끌어다 올린 탓에  어느 날 샤워를 하고 보니 깨끗한 물이 아니라 흙탕물이 쏟아져 내려왔다. 난 즉각 항의를 했지만 그는 갑자기 내 말을 못 알아듣는 척하고 주제와 상관없는 이야기로 은근슬쩍 넘어갔다. 한동안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1년이 지나고 인도네시아를 떠날 때가 되자, 그는 내게 줄 선물로 인도네시아 전통 의상 바틱을 주었다. 자신은 평상시에 바틱이 아닌 양복 와이셔츠를 입고 다녔으면서... 이럴 때면 국적 없는 떠돌이 중국계가 아닌 다시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돌아와 있다. 언젠가 일본 유학을 꿈꾸는 자기 아들도 보여주겠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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