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레이 Dec 24. 2017

성장과 성숙 사이

나를 보내지 마 - 가즈오 이시구로를 읽고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는 올해 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이다. 영화로는 원어 제목 그대로 2010년 캐리 멀리건과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네버 렛 미 고』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이 책은 주인공의 심리를 매우 치밀하면서 동시에 이 얘기 저 얘기 가져다 붙이는 등의 덧댄 흔적 없이 깔끔하게 묘사한다. 전혀 자극적이지도, 현학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이 책은 스포일러 전혀 없이 작가의 의도대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야 훨씬 재밌을 것 같다.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다운 모습으로 인정받는 것이 성숙이라면, 그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나만의 인생의 길을 개척하는 것은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두 여주인공 루스와 캐시는 주어진 운명을 뛰어넘고 삶을 아름다운 것들로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두 인물의 방법은 각기 다르다.      




1. 초반부


 주인공 캐시에겐 항상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명랑한 여자애 루스와 독특한 감수성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쉽게 상처를 받는 남자애 토미라는 두 절친이 있다. 초반부를 읽으며 내 초등학교 시절 생각이 나며 웃음이 났다. 교실에서 애들 무리 지어 다닐 때 웃긴 이야기를 잘 지어내거나 기발한 장난짓을 잘해서 인기를 독차지하는 친구가 꼭 있었다. 그 친구가 듣는 노래는 반 전체에 유행했고, 학교 끝나고 노는 데는 그 친구가 가자는 곳으로 정해졌다.

 이처럼 루스는 비공식적으로 또래 친구들 사이의 여론을 주도하는 인물이다. 루스가 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가 우쭐할 정도다. 때로는 루스가 자신이 특별한 대접을 받기 위해 얄미운 행동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캐시는 루스의 여린 마음까지 헤아려주며 루스의 귀여운 거짓말(또는 기만적 행동)을 잠자코 넘어가거나 지지해준다. 때로 루스가 외로워질 때도 캐시는 루스를 항상 생각하며 찾아간다.  

 한편 독특한 감수성을 지닌 토미는 항상 또래 사이에서 빛나는 루스와는 정반대 편에 있다. 그는 달리기나 축구를 잘하지만 성격적으로 욱하는 기질을 못 참고 내성적인 아이다. 어릴 때 보면 장난질당하는 애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면 그때 놀리는 애들은 더 재밌다고 낄낄대며 집요하게 장난친다. 그리고 그게 심각해지면 괴롭힘이 된다.

 토미는 왕따를 당한 아이였는데, 어느 순간 자신의 결점을 극복하고 중심부와 다소 떨어진 거리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존재가 된다. 루스가 대낮에 밝게 빛나는 태양이라면, 토미는 밤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달이다. 결국 나중에 루스와 토미는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기숙학교 헤일셤의 교장 에밀리 선생님은 자신이 세운 헤일셤을 통해 이상향을 구축하는 꿈을 가진 야심적인 사람이다. 비록 아이들에게는 깐깐하고 냉정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헤일셤의 아이들을 보는 그녀의 시선은 매우 독특하다. 때로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는데, 그녀가 보여주는 고뇌는 작중 후반부에 밝혀지게 된다.




2. 느낀 점


 2005년에 발표된 이 책은 장기를 기증할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복제 인간을 소재로 쓴 소설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나온『헝거 게임』, 『다이버전트』와는 달리 주인공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비장한 영웅이 아니다. 오히려 장기 기증 때문에 점점 마모되다 결국 소멸할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어찌 보면 무기력해 보일 정도로 받아들인다. 이 소설엔 격정적인 갈등 상황이 거의 없이 잔잔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쭉 흐른다. 그래서 복제인간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SF소설보다는 성장소설로 읽힌다.

 난 클론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잔잔하고 상세하게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위주로 접근한 이 소설이 매우 좋았다. 이시구로는 소설 속 인물을 실제 사람과도 너무 닮을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소설 속 인물이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처럼 내 머릿속에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다. 주로 SF소설은 초반부 세계관 설명에 상당한 분량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게 없고 독자는 이 책의 시대 상황을 간접적으로 추리해가며 읽어야 한다. 책 페이지를 끝까지 마쳐도 소설의 세계관에 대해 제한된 정보만 알 수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책 페이지를 덮으며 떠올려야 할 것은 등장인물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소중한 사람과 작별할 땐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지 등의 몇 가지 질문이다. 소소하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또는 무겁지는 않지만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작가가 캐시의 관점이 아닌 에밀리 선생님 또는 마담의 관점에서 썼으면 어떻게 변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캐시는 중반부에 자신이 장기를 기증할 운명으로 태어난 복제인간임을 서서히 깨닫지만, 에밀리 선생님이나 마담은 이 모든 걸 다 알고도 헤일셤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에밀리 선생님은 복제인간들인 헤일셤의 아이들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여겼고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매번 다짐한다. 그저 복제인간이 교육받을 기회 없이 사육당하기만 하는 다른 센터와는 달리 헤일셤의 교장 에밀리는 복제인간도 인간처럼 영혼이 있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매우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며 힘썼다. 마침내 교양을 갖추고 예술을 이해할 정도로 훌륭하게 자란 자신의 학생들을 보자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워 하지만, 동시에 인간인 자신과 클론인 캐시와 선을 긋는다. 에밀리의 말을 읽으면 무지가 주는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너희가 게임의 담보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리라는 건 안다. 충분히 그렇게 느껴질 수 있어. 하지만 생각해보렴. 너희는 그래도 행복한 담보물이야.

    


 성장과 성숙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주제가 있다. 에밀리 선생님은 성교육 시간에 섹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감정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성행위하는 '대상'에게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헤일셤의 섹스와 코티지에서의 그것은 다르다. 복제인간들의 임시거처 코티지에는 헤일셤 말고도 다른 센터에서 온 아이들이 많다.  코티지에서 헤일셤의 아이들은 성숙한 분위기에서 자신을 적응시킨다. 하지만 그곳에서할 때 상대방의 미묘한 감정을 배려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성장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코티지의 섹스는 기계적이었고, 파트너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보다는 자신의 기분전환이 우선이었다. 


 루스는 과감하게 자신의 성장과 성숙한 사회 분위기에 빠르게 맞춰간다. 유치한 헤일셤 시절을 단절하는 것이 성장과 동일하다는 식으로. 그래서 코티지에 오자 루스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사들을 외우거나 선배들의 행동거지를 따라 하며 잘난척하며, 헤일셤의 추억이 담긴 자신의 수집품을 버리기도 한다. 물론 지금까지도 헤일셤의 추억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캐시는 이에 배신감을 느끼며 루스와 대판 싸운다. 나중에 이 때를 후회하며 캐시는 이렇게 회고한다.


발전하기 위해, 성장하기 위해, 헤일셤을 뒤로하고 나아가기 위해 루스가 기울인 순전한 노력에 당시 나는 한 번도 감사를 표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사건 이후로 시간이 좀 지나자 루스는 자신의 근원자를 찾아 나섬으로써 코티지 밖의 삶을 꿈꾼다. 루스는 자신의 근원자가 오피스에서 일하는 멋진 커리어우먼이라면, 자신도 춥고 눅눅한 코티지 밖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멀리서 볼 때 루스의 근원자로 보인 사람은 가까이서 보니 루스와 닮지 않았고, 이내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루스는 비록 자신은 실패했지만 토미와 캐시는 꿈을 이루는 삶을 살기를 바라며 힘들게 얻은 마담의 집 주소를 토미에게 넘긴다. 캐시는 다르다. 캐시는 자신의 근원자가 분명 플레이보이 잡지에 등장할 여자라 처음부터 기대치를 낮춰 생각하며, 그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라 증명하기 위해 포르노 잡지를 훑어본다. 몇 년 후 캐시는 루스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네가 그 문제에 좀 더 노력해야 했다는 생각이 이따금 들지 않니?" 내가 루스에게 물었다. "맞아, 그랬더라면 네가 최초의 사례가 되었을지도 몰라. 우리 중에서 처음으로 그런 일을 한 사람으로 말이야.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혹시 시도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때때로 궁금하지 않니?"
 "내가 어떻게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었겠어?" 루스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낮아져 있었다. "그건 그저 한때의 꿈에 불과해. 그뿐이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로운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꿈꾸지만, 한계를 규정짓는 천장을 뚫고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우리 인간 모두는 복제인간으로 태어나 꿈을 이루는 데에 실패한 루스나 캐시와 다를 게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좀 먹먹해진다.

작가의 이전글 오만과 편견, 그리고 설득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