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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레이 Dec 22. 2017

오만과 편견, 그리고 설득 (2)

에토스, 좋은 덕목을 갖춘 사람이 설득에 성공한다

[전편]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좋은 설득 (1)


Ⅲ.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 다아시가 청혼 때 사용한 설득 분석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그의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통계자료가 잘 보존된 몇몇 유럽국가들의 과거 GDP와 불로소득에 대한 연구를 방대한 시기에 걸쳐 조사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제인 오스틴의 소설 배경인 1800년대 초 영국 1인당 연간 평균 소득은 30파운드였다. 한편 소설 설정 상 다아시는 1년에 1만 파운드의 연 수입을 지대로 벌어들이는데, 이는 평균 소득의 300배를 훌쩍 넘기는 수준이다. 물론 재산이 절대적으로 많다고 해서 여성이 무조건 청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재산이 많은 사람의 청혼을 엘리자베스가 거절했다는 것은 곧 그의 설득이 매우 형편없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실제로도 다아시는 엘리자베스가 그의 청혼을 거절할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의 안색은 분노로 창백해졌으며, 표정 하나하나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냉정을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스스로 냉정을 되찾았다고 확신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기로 작정한 듯했다. 


 다음으로 다아시의 설득이 미흡했던 이유를 설득의 3요소로 분석해본다. 

 

1. 엘리자베스가 본 다아시의 에토스  

    

 그가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청자 엘리자베스가 판단할 때 화자 다아시의 에토스가 매우 신뢰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빴기 때문이다. 다아시는 그의 친구 빙리와 엘리자베스의 언니 제인 사이의 결혼을 가로막고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했는데, 이를 들은 엘리자베스가 그의 에토스를 비난하는 건 당연했다.      


 “제가 설사 당신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지 않았거나 아니면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하더라도, 아니 심지어 호의를 품고 있었다 해도, 사랑하는 언니의 행복을 짓밟아버린, 아마도 영원히 짓밟아버린 장본인의 청혼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특히 만약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해도 거절했을 거라는 그녀의 말은 언니 제인의 행복을 방해한 다아시의 참견 행위가 결정적인 거절 원인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다아시의 에토스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된 원인을 하나 더 말하는데, 그건 다아시가 위컴의 재산을 가로채며 그의 인생을 망친 주원인을 제공했다는 의혹이다.     


 “제가 당신을 싫어하는 이유는 또 있어요. 그 일이 있기 훨씬 전부터 당신에 대한 제 견해는 이미 정해져 있었어요. 몇 달 전에 위컴 씨 이야기를 듣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훤히 알게 됐어요. 그 문제에 대해선 무슨 말씀을 할 수 있으시죠? 있지도 않은 우정을 들먹이며 변명하실 건가요? 아니면 어떤 거짓 설명을 가지고 사람들을 기만하실 건가요?”      



 “저한테는 당신을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충분하고도 남아요. 당신은 그 문제에 관한 한 부당하고 편협한 행동을 했고, 어떤 동기도 그에 대한 변명은 되지 않아요.”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에토스를 신뢰하기 어려운 이유를 말하는 대목에서 두 사례를 들며 예증한다. 다아시가 위컴의 창창한 앞길을 방해한 이전 사례는 곧 제인의 행복을 짓밟아버린 이번 사례와 매우 비슷하다. 엘리자베스의 입장에서 볼 때 다아시는 예전부터 착하고 무고한 사람들의 행복을 방해했고, 앞으로도 쭉 그럴 사람이다. 그러니 엘리자베스가 거절한 가장 큰 이유는 다아시의 에토스에서 덕성, 실천적 지혜, 그리고 호의를 전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마지막 말에서 그의 에토스를 철저히 부정하며 쐐기를 박는다. 


 “당신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처음 알게 된 바로 그 순간이라 해도 좋을 것 같군요, 저는 이미 당신의 태도를 보고 당신이 거만하고 잘난 체하며 자기 생각만 하면서 남의 감정은 무시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다른 일들이 쌓이면서 그런 좋지 않은 인상이라는 토대 위에 단단한 혐오감이 자리 잡았다고 할까요. 그랬기 때문에 당신을 알게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당신 같은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2. 엘리자베스의 파토스와 다아시   

  

 한편 다아시는 자신의 에토스가 흠결이 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을 정도로 자존심이 매우 높은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거절을 듣자마자 그 모든 이유를 자신이 엘리자베스가 듣기 좋은, 말하자면 사탕발린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돌린다. 즉, 청혼이 실패한 전적인 이유가 파토스를 고려하지 않은 자신의 꼿꼿한 태도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당신은 그런 잘못을 눈감아 줄 수 있으셨을지도 모르지요. 제가 만일 여러 이유 때문에 진지하게 청혼을 고려할 수 없었다는 걸 솔직히 고백해서 당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만 않았더라도 말입니다. 제가 만일 짐짓 제 심적 갈등을 감추고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제가 이성적으로 따져봐도 깊이 성찰해 봐도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사랑에 입각해 청혼하는 거라고 믿게끔 당신의 비위를 맞춰드렸더라면, 이런 신랄한 비난은 안 나왔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저는 어떤 종류의 가식도 혐오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여러 감정에 대해서도 부끄럽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건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당신 집안이 열등하다는 사실을 기뻐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으십니까? 저보다 신분이 확실하게 낮은 사람들과 인척 관계를 맺는다고 춤이라도 출 줄 아셨나요?”     


 ‘당신의 비위를 맞춰드렸더라면-’과 ‘저는 어떤 종류의 가식도 혐오합니다’ 등의 구절에서 그는 파토스를 고려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말하고 있고, 목적을 위해 가식과 타협할 의사가 없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오만한 그의 태도는 엘리자베스의 화를 더 돋웠고, 그녀는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잘못 아셨습니다, 다아시 씨, 좀 더 신사다운 태도를 보이셨더라면 청혼을 거절할 때 미안한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의 태도 덕분에 그런 미안함을 안 느껴도 되었던 것 말고, 무슨 다른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해십니다.”
 그녀는 그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는 것을 보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계속했다.
 “당신이 어떤 태도로 청혼을 하셨다 해도 그걸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가 또다시 놀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억울해하는 표정이 뒤섞인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가 오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더라도 그녀의 판단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라 밝히는데, 이는 설령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의 파토스를 고려한 설득을 했더라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 것임을 뜻한다.

 하지만 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서 드러나는 것일 뿐, 제인 오스틴이 묘사하는 엘리자베스의 감정 부분을 들여다보면 내심 엘리자베스도 파토스를 고려하지 않은 다아시의 오만한 태도를 매우 분개시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드러나는 말로는 파토스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밝히지만, 그녀가 속으로 삭히는 감정으로 미루어보면 파토스가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상당히 많은 경우 말과 생각은 따로 논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강한 애정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긴 했다. 그러나 그의 오만, 그 가증스러운 오만, 자신이 제인에게 한 일을 인정할 때의 뻔뻔한 태도, 받아들일 수 없는 당당한 태도로 딱히 변명도 하지 않고 자신이 한 일을 시인하던 것, 그리고 위컴 씨에 대해 언급할 때 보인 냉혹한 태도, 그를 잔인하게 취급했다는 걸 부인하려 들지도 않던 것 등은 곧 그의 애정을 생각하는 동안 잠시 솟아났던 그녀의 동정심을 압도해 버렸다.      


3. 다아시의 프러포즈에서 나타나는 로고스 


 다아시는 엘리자베스를 설득할 때 상당 부분을 엉뚱한 곳에 사용했다. 그는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로고스를 할애한 것이 아니라, 왜 그의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청혼했는지를 밝히는 데에 구구절절하게 로고스를 사용했다.   

  

 그의 말은 훌륭했다. 그러나 그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감정 외에 다른 감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해야 했다. 애정에 대해서보다도 자존심에 대해 말할 때 더 열변이었다. 그녀의 신분이 열등하다는 것, 그런 결혼은 집안에 수치라는 것, 그녀의 집안을 생각하면 이성은 언제나 감정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 등을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했는데, 그렇게 열을 올리는 것은 지금 자신이 스스로 손상시키고 있는 그 신분 때문인 듯했지만, 그의 청혼에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다아시의 대저택


 제인 오스틴이 직접적으로 말한 것처럼, 다아시는 ‘그의 청혼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부분에 로고스 요소들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녀의 신분이 열등하다는 것’은 ‘그녀와의 결혼이 집안의 수치라는 것’을 강화하며, 이러한 사실이 ‘그의 이성이 언제나 감정에 제동을 걸었다는’ 이유를 단단히 뒷받침한다. 이렇게 탄탄한 로고스적 구조를 갖춘 말이 결과적으로 엘리자베스가 거북해할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건 매우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Ⅳ. 결론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이 출판될 당시 결혼은 여성의 일생일대 최종 목표였다. 19세기 영국 여성에게 재산 상속권은 없었고 여성에게 적합한 일자리 또한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성 스스로 자본을 일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러한 처지에 놓인 여성들이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남자와의 결혼뿐이었다. 그리고 결혼 이후의 인생이 남편의 성품 및 재산 등에 의해 크게 좌지우지되었기 때문에 결혼 상대를 매우 신중하게 골라야만 했다. 따라서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에서 분별 있는 여자라면 아무리 훌륭한 남자의 청혼이라도 단번에 받아들이기란 어렵고 매우 신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에게 청혼할 때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비록 남자가 사회-경제적인 구조상 여자들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하긴 하지만, 일생 전체를 같이 보내기에 적절한 결혼 상대를 구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갖은 노력을 다해야만 했다. 

 한편 다아시의 청혼 실패 사례로 볼 때 남자가 여자에게 구혼할 때에는 남자의 에토스가 여자의 파토스보다 설득 과정에서 훨씬 더 본질적인 요소로 보인다. 다아시는 자신이 파토스를 고려하지 않아 자신의 청혼이 실패했다고 착각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아무리 파토스를 고려한 방법으로 설득하려 해도 에토스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거절한다고 단칼에 말한다. 물론 엘리자베스는 내심 자신의 파토스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의 오만을 싫어하기는 한 건 사실이지만 파토스는 그녀의 결정에 있어서 단지 작은 부분이었을 뿐이다. 

 다아시가 극 중 후반부에 두 번째로 청혼할 때 성공한 가장 큰 이유도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간 여러 오해들이 풀렸고, 결국 그녀가 그의 에토스를 비로소 제대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의 두 번째 청혼을 들은 이후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태도가 보통 이상으로 어색하고 긴장되어 있음을 느끼고서, 이제 말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즉시 아주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언급한 지난 4월 이래로 자신의 감정이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서 지금은 그가 한 말을 고맙고도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을 알렸다.           

 종종 현실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상대로 설득할 때 중요한 비결은 여자가 듣기 좋은 말을 잘 골라하는 것이라 말한다. 파토스가 끼치는 영향은 매우 커서 엘리자베스처럼 이성적인 사람도 파토스적 설득에 매우 능한 위컴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상대방을 관찰할 기회와 시간이 많아질수록 파토스에만 치중한 설득은 약해지고, 좋은 덕목을 지닌 사람이 돋보이게 된다. 이때 좋은 덕목에는 성격뿐만 아니라 경제적 자본도 포함된다.


 여성은 성선택을 할 때 성실형과 사기꾼형(dads and cads)을 놓고 고민한다. 성실형은 좋은 형질과 성격, 그리고 한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볼 것을 약속하는 남성인 반면 사기꾼형은 한눈에 이목을 끌지만 오래가지 못하는 매력을 과시하는 타입의 남성이다. 성실형은 좋은 에토스를 지니고, 사기꾼형은 파토스를 고려한 설득에 능하다. 물론 성선택 시 어느 타입이 도덕적으로 옳으냐에 대한 질문은 의미가 없으나, 만약 매우 장기적인 형태의 성선택인 ‘결혼’을 놓고 본다면 성실형이 더 결혼 파트너로서 가치가 높은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일생일대의 선택인 결혼을 고민할 때에는 파토스에 휘둘리지 말고 후보자의 에토스의 진면목을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제인 오스틴의 주장이며, 이런 간단하고도 만고불변의 진리를 제인 오스틴은 흥미진진하게 풀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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