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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레이 Dec 29. 2017

02. 여권 없는 5달

인도네시아 관습과 공무원

"이 나라는..."


 인도네시아에서 만났던 4-50대의 한국인들이 불평을 시작할 때 자주 내뱉던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인도네시아를 철저히 타자화하겠다는 심리가 들어있다. 이 나라는 전기가 매번 끊겨. 이 나라는 공무원한테 뇌물을 줘야 일처리가 빨리빨리 돼. 이 나라는 경찰이나 동네 건달들이 다른 게 없어 등등.

 이후 맺음말은 "허허... 한국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야"로 끝난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그럼요 한국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여기선 아무도 믿으면 안 돼"라며 훈훈하게 맞장구를 친다.


 타국을 깔아뭉개고 기승전 국뽕으로 이어지는 이 기묘한 대화의 흐름은 대체 뭔가. 이것이 바로 꼰대들의 세계란 말인가. 처음에 나는 이런 한국인들의 배타적이고 남을 깔보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에 왔으면 그 나라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문화에 적응하려고 해야지 왜 무시하고 섞이지 않으려 할까. 그리고 한창 젊은 나이의 나는 듣는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그런 어른들의 시니컬한 태도가 별로였다.

 하지만 나도 곧 "이 나라는..."이란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하며 먼저 이 곳에 온 그들이 이미 겪었던 고뇌에 빠진다. 우울한 결론이지만, 이런 내면적 고통은 인도네시아로 진출한 한국인이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과정인 것 같다.

 긍정적인 사고에만 집중하려 노력해도, 언젠가는 한 번쯤은 인도네시아의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인 공무원, 지역 커뮤니티 수장, 또는 영화 액트 오브 킬링에 나오는 빤짜실라 청년단과 같은 준무장단체들과 직면해야만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하는 한 이들 모두는 다 이해관계자들이기 때문이다.

 

액트오브킬링의 안와르 콩고와 준무장단체 빤짜실라 청년단


 한국을 나가면 갑갑하지만 안전한 보호막이 벗겨진다. 자본을 모아 삶을 바꾸겠다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호기롭게 해외로 뜨지만, 막상 낯선 곳에서 적응하다 보면 인생이 더 각박해지면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냉소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나는 소모적 업무에 시달리는 한국의 노동자로 살기 싫어 다시 활력이 넘치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먹고살기를 해결하려 이런저런 노력을 하고 부딪치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회색빛 필터로 거른 채로 볼 것 같다.




마스 아부두르 


  우리는 8월 말에 입국을 했는데, 입국한 지 네 달이 넘도록 이민국에서 여권을 다시 돌려주지 않았다. 처음엔 원래 행정처리가 느리니까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우리는 공식적으로 인도네시아 정부의 초청을 받고 온 정부초청장학생이니 설마 뭔 일 있겠어?라고 다들 생각했다. 그러다가 여권이 사라진 지 네 달이 넘으니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인도네시아 공무원들은 행정처리를 일부러 질질 끌면서 사람을 답답하게 하는데, 이때 뇌물을 주면 언제 무슨 문제가 있었냐는 듯이 빠르게 해결된다. 마치 웃돈만 얹어주면 대기시간 없이 티익스프레스나 사파리를 바로 타게 해주는 에버랜드의 큐패스처럼. 큐패스는 자기 돈 내고 서비스를 받겠다는 거니까 넘어간다 쳐도 국가 공무를 돈 주고 해결한다는 건 명백한 도덕적 해이다.


 우리의 불만을 들어야 하는 불운한 담당자는 성실하고 유능한 30대 무슬림 압둘이었다. 일본인 친구 레미가 아부두루라고 해서 나도 마스(mas, 아저씨 또는 형) 아부두루라고 따라 하며 장난쳤는데, 그런 이름 갖고 하는 유치한 장난도 다 받아주고 온화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너무 일을 잘해 그 많은 대학교 내 국제학생 관련 행정처리를 혼자 담당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직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자기 업무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종종 결근하기도 했다. 게다가 대학교 내 행정처리는 끝났는데, 이민국에서의 심사가 질질 끌리는 건 압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자바 전통으로는 상급자와 하급자 간 예절을 중시하는 데, 압둘은 이민국 공무원에 비하면 하급자였던 것.     

 우리는 불만을 토로할 사람이 압둘밖에 없었다. 특히 우리 중에서 가장 인니어를 잘하는 러시아 친구 이리나가 가장 불만이 많았다. 불만을 제기하고 따지며 인니어가 는다는 우리끼리 하는 농담이 있었는데, 이리나는 그중 최고 레벨에 도달한 정의의 사도였다. 때때로 매번 시달리는 아부두르가 불쌍할 정도였다. 아부두르는 영어로 컴플레인을 제기하면 일부러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하며 회피했지만, 이리나가 인도네시아어로 따지면 별 수 없이 쩔쩔매며 당해야만 했다.

 두 달쯤 지나자 인내심이 바닥난 나와 레미, 그리고 몇몇 친구들도 이리나를 도와 압둘에게 협공했다. 허공에 떠도는 말잔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우리 여권 내달라. 왜 아무것도 안 하냐. 최소한 이민국에 따질 수는 있지 않냐. 자꾸 안 주면 따로 이민국 찾아가서 뇌물주고 내 것 찾아오겠다 등등. 온화한 웃음으로 처절하게 방어하던 압둘은 마지막 뇌물이란 단어에 비로소 반응했다.


진짜 미안하지만 난 너희들이 인도네시아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길 바라지는 않는다.

     

 여태까지 다른 그의 모습에 우리는 흠칫 놀랐고, 결국 당분간 그 주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 사람도 미안해하는구나. 자기 나라 공무원들이 이렇게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부끄럽지만 일부러 티를 내지 않으려 뻔뻔한 척했던 거구나. 그래 그랬구나. 근데 그래도 괘씸하긴 하네, 사정을 빨리 말해주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경찰 TV쇼에 강제 출연당한 내 친구 산티아고 

 

 나랑 같이 대학 수업을 듣는 친구 중에 콜롬비아에서 온 산티아고라는 친구가 있었다. 커피는 인도네시아 만델링보다는 자기네 콜롬비아 메데인이라며 자랑해대던 그 친구가 방송에 나온 건 1월 초였다. 어느 날 인도네시아 친구한테서 라인 메시지가 떴다. 내 친구가 인도네시아 전국 TV에 나온다는 것이었다. Netmedia의 86이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실제 경찰이 순찰을 돌며 적발하는 내용이었다.

 

유튜브에도 저 영상이 아직까지 있는데 그때 내가 분노해서 막 댓글달기도 했다.

   

 그때 그 TV쇼가 스마랑 야간 순찰을 돌던 경찰을 찍었는데, 하필 그 친구 방까지 동의 없이 들어갔던 것. 방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여과 없이 방송을 타고 보내졌고 게다가 얼굴 모자이크 처리까지 없었다. 산티아고는 여권이 이민국에 있었고, 인도네시아 말이 아직 안 늘었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경찰이 의미 없이 계속 취조하는 내용이 이어졌다. 결국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이민국과 잘 협의하라는 일장연설로 마무리.  

 그때부터 인도네시아 경찰, 이민국 등 공무원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나라 경찰은 귀여운 포돌이 캐릭터로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하는데, 근데 왜 이 나라는...이라는 말이 입에 붙기 시작했다.    


 난 인도네시아가 좋다. 사람도 좋고. 하지만 저런 공무원들의 권위주의와 개인에 대한 배려 없는 태도는 너무 싫다. 팔짱 끼면서 배를 뚝 들이밀고 내가 너의 중요 이해당사자니 나를 거쳐가야만 한다는 식의 태도. 이렇게 인도네시아에서는 공무원들을 현명하게 피해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며 적응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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