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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rA May 17. 2023

연결의 방: 이방인의 초대

방으로의 초대

웅장한 성이 제 앞에 있습니다. 화려하고 찬란했을 절정의 흔적들이 성벽 곳곳에 묻어있는 듯 하지만, 지금은 그냥 낡고 오래된 큰 성입니다. 여기저기서 기품이 배어 나오지만, 그 기운들은 시간의 중력에 눌려 금세 바닥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처음 본 문양과 낯선 글귀들이 제 시선을 사로잡지만, 해석할 수 없는 모양과 글자들은 금세 공중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어색할 정도로 성문이 절 향해 활짝 열려있습니다. 마치 제가 찾아오기를 미리 알았다는 듯이 말입니다. 조심스레 성 안으로 발을 옮깁니다. 미지의 공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앞서는 것은 왜일까요? 제가 받은 낡은 초대장 때문일까요?


빛바랜 회색의 고성이라 당연히 휑뎅그렁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성안은 알 수 없는 다양한 느낌의 공기로 이미 가득 차 있습니다. 부드러운 아치형의 목조 기둥과 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런지 따듯함이 묻어납니다. 너무 밝지도, 그렇다고 너무 어둡지도 않은 조명이 아늑함을 뿜어내고, 붉은 계열의 카펫이 땅의 냉한 기운을 녹이고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영사기를 돌리며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영화 필름을 투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지금은 여기에 시선을 두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성이 꽤 크고 높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야 이 성 곳곳을 다 둘러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끝이 보이지 않는 나선형 계단을 서둘러 올라갑니다. 이상한 시계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분침과 시침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안도감을 느낍니다.


싱그러운 풀향이 진동하는 방 앞에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문을 조심스레 열어봅니다. 햇빛이 쏟아지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한 꼬마가 숨바꼭질을 합니다. 여러 명의 어른들이 꼬마가 눈앞에 뻔히 보이지만 모른척하며 목이 터져라 어디 있냐고 도저히 못 찾겠다는 시늉을 합니다. 행복을 가득 머금은 꼬마의 미소가 햇빛에 반사돼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제가 잘 아는 누구의 입꼬리와 너무 닮아있습니다.


다른 문 앞에 섰습니다. 사우나에서 볼 법한 열기가 문 틈을 비집고 나옵니다. 한 남자로부터 나오는 뜨거운 기운이었습니다. 열정과 오만함의 아우라로 똘똘 뭉친 한 남자는 그 어떤 장애물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빨리 뛰어가고 있습니다. 거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에게 물리적 경계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아 보입니다.  이국적인 공간에서 언어나 매너 그 어떤 것 하나 부자연스럽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자신감의 여유를 부리는 그를 저는 어느덧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에게 한 발 다가서고 있습니다.


달콤한 꽃향기가 진동합니다. 살랑살랑 봄바람 부는 날 한 남자가 소중한 한 사람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갑니다. 두 손 꼭 잡은 채 서로의 마음을 충전 중인 연인의 뒷 표정을 바라보며 제 마음도 충분히 설렙니다. 진한 사랑이 전하는 향기 때문일 겁니다.


왠지 모를 익숙한 기운이 흐르는 방에 발길을 멈췄습니다. 위엄 있는 맑은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계획대로, 그의 열정대로 강줄기가 형성되진 않았지만, 그를 꼭 빼닮은 작은 사람에게는 그의 한결같은 책임감과 사랑의 에너지가 흘러들어 갔습니다. 바다처럼 넓고 지혜를 가득 채운 그 작은 사람의 에너지의 원천은 그 맑은 강 때문일 테지요.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조명이 조금씩 어두워집니다. 문득 낯익은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발걸음을 돌려 나가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미 하나의 방문이 절 향해 열려있습니다. 불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니 촛불이 켜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매번 제가 못 본 척 도망쳤던 초의 눈물이 산처럼 쌓여있고, 몽당 초는 공기 흐름 따라 춤을 추고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올 때 있었던 그 시계는 이젠 분명 빨리 감기를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머물러 보기로 합니다. 제가 애써 그에게 한발 다가섰는데 바로 후퇴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만의 추억으로 가득 찬 성으로 초대해 준 그를 저만의 방식으로 이해해보려 합니다. 그는 수많은 추억의 조각들로 채운 방에서 그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지요. 세상에 하나뿐인 그녀를 만나 사랑하던 그때의 시간안에서 행복해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그 중에 그대를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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