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 관람
1월에 본 영화 중 몇 편에 대한 끄적임. (늘 그렇듯 내용에 대한 설명이 별로 없어서 스포는 없다.)
비바리움 (Vivarium, 2020)
(대충 내 기억에) 비주얼적으로 볼만한 영화 리스트에 종종 보았던 영화라 궁금해서 보게 된 올해 첫 영화다. 정말 비. 주. 얼. 만 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대단히 신선하지도 않았던 이유는, 비주얼 측면에서는 "돈 워리 달링"이 떠오르기도 했고, 내용 측면에서는 "스텝포드 와이프"가 떠오르기도 해서다. (이게 영화를 보는 타이밍이 중요한 게, "돈 워리 달링"은 2022년에 나온 영환데 내가 이 영화를 먼저 봐버렸다...)
썩 마음에 든 영화는 아니었는데, 뭐 유럽 영화처럼 아예 대놓고 난해해서 그 의미를 파악하기도 어렵거나 그 맛으로 보는 영화도 아니고, 전형적으로 뭔가 스토리가 있는 (듯한) 미국 영환데, 이건 뭐 "로직"이 없네라고 느끼기는 또 처음일 정도로 뭔가 설명이 되지 않는 "갭"이 느껴져서다. 이렇게 뭔가 스토리텔링을 하는 듯한 영화에서는 난해한 장치에 대해 어느 정도 좀 납득이 될 만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뭔가 이해가 될 듯 말 듯 한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런 근거도 논리도 없이 감독이 넣고 싶은 것을 억지로 끼워 넣은 느낌? (그러한 장치들이 기괴해서 눈길은 끄는데, 그게 목적이라면 성공이겠다만...) 대~충 알 것 같으면서도 딱히 설명은 되지 않는, 그런 애매함이 있는 영화였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 2023)
하지만 난해함의 끝은 역시나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였다. 이동진을 매우 좋아하지만 가끔 그의 별점은 나를 참 배신하곤 한다...ㅠ 파이아키아에 이 영화에 대한 해설 영상도 올라왔던데, 그 정도의 해설을 듣고 나서야 이해가 될까 말까 한 영화라면 관객에게 너무 많은 피로감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제는 웨스 앤더슨 스타일 표 비주얼도 많이 익숙해져서 식상해지는 판국에 비주얼만 즐기기 위해 그의 영화를 본다 하기에는 딱히 의미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이 영화에서 어린아이들이 하는 말게임이나, 그 외 다른 인물들의 대사들이 대부분 참... 뭐랄까... 튀려고 온갖 의미 없는 말들을 지껄인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사는 또 어찌나 빠른지 듣자마자 따라가는데 급급해지고, 듣자마자 휘발되어 버리고, 그렇다고 딱히 재미나 감동이 있지도 않고... (뭐 굳이 하나 떠올리자면, "좋은 타이밍이란 없어"였나? 이 대사 하나 기억나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보긴 했는데 이제 이 감독 영화는 좀 걸러야 하려나 보다. 나에겐 갈수록 움직이는 (게다간 이젠 새롭지도 않은) 화보집 같은 느낌...
겨울 이야기 (A Tale of Winter, 1992)
수집가 (The Collector, 1967)
봄 이야기 (A Tale of Springtime, 1990)
가을 이야기 (A Tale of Autumn; 1998)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4편이나(!!)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에릭 로메르 영화에 나오는 이 한없이 갈팡질팡하고 본인의 감정에만 충실히 행동하는 인물들을 보며 욕할 수도 있고 이해를 못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들이 너무나도 솔직해서 그게 귀엽기도 하고 그냥 재미있다. 사실 사랑에 있어서 사람의 감정은 시시각각 바뀌지 않나. 한 사람만 충실히 사랑하고 바라보는 얘기는 어쩌면 환상동화일지도 모른다. (물론 “겨울 이야기“에서는 사실 여주가 한 남자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는 한다.) 옛날 프랑스 분위기를 보는 재미도 있고. 뭐 아주 엄청난 사건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상 속에서 (=사랑의 맥락에서), 사람들의 감정 날것 그 자체를 보여줘서 좋다.
몇 개 기억에 남는 대사들 중 이런 것들이 있다. 물론 기억에 의존하여 아마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이건 내 감정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수집가" 중;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한테 엄청 틱틱대기도 하고 잘해주기도 하다가, 괜히 쿨한 척 자처해서 다른 남자와 이어주려다가 질투도 느끼고, 온갖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겪으며 찌질함과 한심함을 오가는 남자 주인공의 대사)
"나는 모든 남자들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가을 이야기" 중; 한 유부녀가 싱글인 자기 친구에게 소개시켜 주려는 남자와 자꾸 오묘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날리는 대사)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2023)
내가 너무, 너무, 너무나도 기대했던 영화였다. 내 또래 한국 여자 감독의 첫 영화인데 무려 오스카 작품상/각본상 후보에 오르다니, 너무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냥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이 영화의 감독, 셀린 송이 너무 궁금해져서 유튜브에서 인터뷰 영상들도 찾아봤는데, 참 자기 영화에 대한 설명도 거침없이 잘하더라. (홍상수 감독이 그렇게 본인 영화 설명을 잘하는 달변가라는데, 이 감독도 정말 말을 잘하더라.) 심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티스트인 장기하가 유태오의 친구로 카메오 출연을 한다니 (진짜 대단한 사람이야... 어떻게 여기까지 출연을?), 진짜 이 영화에 대한 내 기대는 엄청났다.
그리고 영화를 보았다. 그런데 참... 뭐랄까... 외국인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이국적인 설정일 것 같긴 한데...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인데, 12살에 미국으로 이민 간 여자 주인공이 외국인 남편과 옛 한국에서의 첫사랑과 같이 만나는 중요한 설정이 있다) 딱 잘라 말해서, 한국말을 다 알아듣는 나로서는 그냥 이 영화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영화의 대사 대략 93% 이상이 한국어인데, 여자 주인공은 12살 때 미국으로 간 사람이기는 하나 너. 무. 나. 도 교포식 한국어 발음을 구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말도 안 되게 이질적인 단어들... 크레딧 보니 한국팀이 따로 있는 것 같던데 대사 검수를 안 한 건지...?) 유태오는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 토종 역할인데 그도 교포 같고... (게다가 영어를 더 잘하는 그로써는 정말 영어를 못하는 "척" 해야 하니... 그 가짜 같은 영어 발음 어쩔... ㅠ) 아 정말 이 영화를 좋아하고 싶었는데... 난 이 둘의 대화가 너무나도 어색하고 이질적이어서 이미 그게 거슬려버린 이상 그걸 무시한 채 이들의 감정에만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유태오 연기는 눈에도 안 들어오고... (이 와중에 영국 무슨 영화제에서 남주상 노미네이트 된 거 실화냐며...?) 결국 이 영화에서 제일 자연스러운 언어를 구사한건 여주의 외국인 남편이었다.
셀린 송 감독은 정말 많은 배우들을 인터뷰했고, 그레타 리와 유태오를 봤을 때 딱 이들이다! 싶어서 캐스팅했다는데. 아 아쉽다... 차라리 그냥 아예 교포가 아닌 한국 배우들을 썼으면 어땠을까 싶다. 외국인들은 그 차이를 전혀 모르겠지만, 한국인으로서 봤을 때는 이 둘의 대화가 심히 거슬리는 포인트였다. 설마 나만 이렇게 느낀 건가 싶어 후기들을 찾아보니 한국인들은 나 같은 반응이 꽤 있는 것 같더라...
추락의 해부 (Anatomy of a Fall, 2023)
예상은 했으나, 역시나 진실은 알 수 없는 결말. 결국 내가 믿는 것이 진실일 수도 있다. 아니, 내가 살아가는데 더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믿는 수밖에 없는 것일 수도.
남자아이의 대사 중에 심히 공감된 것이 있었다. 이미 상처받았고, 더 상처받기 위해 알려고 하는 거며, 그래야 극복할 수 있다,라는 뭐 그런 대사. 나도 그런 적이 있고 (아니, 아마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종종 "과연 아는 게 힘일까, 모르는 게 약일까?"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이 대사를 들으니 좀 더 명확해졌다. "아 바로 저 이유네, 내가 늘 상처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더 진실을 알려고 하는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