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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훈 Feb 27. 2023

킹메이커(2022)

<킹메이커(2022)>


 이상은 어디로 갔는가(22.02.27.)


근래에 영화 <킹메이커(2022)>를 극장에서 내려가기 전에 다시 한번 볼 기회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두고 마키아벨리와 플라톤을 빗대며 정치의 본질과 방법론 사이의 투쟁이라고들 이야기 했다. 하지만 난 영화를 보거 참 우울해졌다. 어쩌면 마키아벨리와 플라톤의 교조를 이야기 할 수 있던 시대에 대한 부러움이며, 세상을 바꾼다는 이상과 대의 간의 치열한 투쟁에 대한 부러움이기도 했다. 왜 정치하냐는 물음, 즉 너의 가치와 대의, 이상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사라진 채 정치라는 행위만 덜렁 떨어져 남은 세계에서 세상을 “디비려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그 이선균과 설경구의 대립이란 것이 어찌나 낭만적이지 않겠나.


인류 사상의 역사는 어쩌면 늘 그 두 가지 힘의 관계에 대한 투쟁의 역사였을지도 모른다. 이른바 우주의 형성과 작동 원리로써 이와 그것이 드러나는 형태로 기를 둘러싼 이기론도 사람들은 망국적 형이상학이라 하지만 역으로는 실천 사상으로 유교의 원칙의 문제였을 것이고, 형상과 질료에 대한 문제, 목적과 수단에 대한 문제 역시 이상과 대의의 실천에 대한 문제였을지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왜 이 돈도 안되고 딱히 사회적으로 인정 받지도 않는(즉 명예롭지도 않은) 일을 하는가 자주 자문하곤 한다. 누군가는 그저 이 세계가 재밌고 폼나서라는 자기만족적인 답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주체할 수 없는 관음증과 인정욕구의 해소를 위한 장일지도 모르겠지만...그 모든 것 너머에 사실 있어 마땅한 것은 이상과 대의에 대한 갈구 아니겠나. 서로 수렴하기 어려운 세계관의 차이가 있기에 우리는 이른바 민자당계의 냉전 공안 세력으로 갈 수 없는 것 아니었던가. 적어도 좀 그 수준과 각론의 차이는 있어도, 두루뭉술하게라도 비슷한 이상이 대의가 있었기에 만나면 맨날 욕하고 싸워도 같이 달리지 않았던가.


돌이켜 보면 어느순간 우리 곁에 이상에 대한 그 목마름과 절실함은 오간데 없고, 대의와 가치는 그저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액세서리가 되어 버렸다. 이 없는 기, 목적 잃은 수단, 질료가 사라진 형상, 기의 없이 텅 빈 기표가 이 세계에 가득해지는 배경에는 사람과 조직 너머에 있는 이상에 대한 갈급함의 상실과 망각이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누군가 나를 일컬어 대구 선거판에서 제일 애 닳아 하는 이라 부르셨다. 이건 단지 일이 팍팍 안 돌아가는 걸 못 견디는 내 인격의 모자람의 문제일수 있고, 뭔가 태엽의 아귀가 맞지 못하는걸 견디지 못하는 내 조급함의 문제일수도 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애닳음의 근원에는 동아시아의 정정에 대한 불안함, 이 신냉전이라는 2차대전과 냉전 해체 이후 우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점을 누려운 세계 구조의 변화 같은 것들에 대한 갈급함이 있다. 우리의 근본 이익은 평화와 자유로움에 있다. 평화와 자유로움에 대한 완고함 속에서 번영과 자존을 세운다는 것은 우리의 원칙이자 대전략이다. 문제는 이 우리의 이해관계가, 원칙이, 대전략이 서있을 수 있는 보습 놓을 땅들이 무너져가고 있다. 우크라니아가 그렇고, 코로나 위기가 만든 자국 중심주의가, 제노포비아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비이성이, 이뤄지지 않은 자국의 목표 달성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대국들의 거침없음이 세계를 그렇게 몰아가고 있다. 어쩌면 난 이재명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정치 권력만이라도 동아시아의 상호 이해와 협력, 자유와 평화라는 기본원칙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발버둥 치는 정권이길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원하는 오늘 이 시대 정치의 이상에는 싸드 추가 배치나 선제타격을 저렇게 말하는 무책임의 자리는 없다.



이상은 늘 약하다. 돈이 우리의 이상을 매일 뒤흔들고, 얄팍한 권력과 자기만족, 관심과 인정욕구 역시 우리의 이상과 대의를 흔들어댄다. 이상은 늘 무력하다. 위대한 가토 슈이치의 책 제목과 달리 탱크 앞에서 그것을 주시하는 펜은 그냥 밟고 가면 그만일 뿐이다. 힘에 대한 찬미와 이상에 대한 냉소가 늘 승리했고, 때로는 가짜 이상들은 비이성과 광기 속에서 참 된 이상들을 기만하고 호도하고 무너트려왔다. 그럼에도 이상이 쉽게 죽지 않는 것에는 그것에 대해 갈급해 하고 그것을 꿈꾸는 이들이 참 질기게 살아 있고, 쓰고 그리고 목소리 내며 버텨내며 그 나름 연대의 기반들을 사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질료 없는 형상, 목적 잃은 수단, 텅 빈 기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폼 나는 것을 욕망하고, 힘을 찬미하고, 소비주의적 자기만족을 권유하며 역사의 진보에 대한 냉소를 장려하는 이 세계에서 이상을 말하는 이들이 쓰러지질 않기를, 이상이란 나침반을 놓지 않기를, 같이 버틸 수 있기를 바래 마지 않는다. 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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