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서경식을 기억하며.
23.12.20.
* 어제 아침에 재일 조선인 문필가 서경식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기사도 나왔네요. 일생을 민주주의와 인권, 소수자, 국가주의와 식민주의 비판을 위해 살아오신 선생님의 여로가 이래 마침표를 찍습니다. 어제 종일 그래 보내고 이제 좀 추스려 직접 사사 받은 적 없어도 감히 제자를 참칭하고 스승이라 사표라 여긴 선생님에 대한 졸고를 적어봅니다.
선생님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2000년대 중반이었다. 드문드문 올라오는 한겨레 칼럼과 몇권의 책 정도였다. 그러다 2008년 전남대 김상봉 선생님과의 대담집 『만남(돌베개, 2007)』을 당시 내 영혼의 캡틴 종욱이형(종욱이 형의 매형이 당시 만남 프로젝트를 함께 한 영민햄이었다.)에게 선물 받고 그 책을 정말 하얀 표지가 거무튀튀할 정도로 읽고 읽었다.
2012년 연말에 꾸린 공부 모임이 언젠가 부터 서경식 선생님의 저술을 읽는 모임이 되어 버렸고, 영민햄까지 여기 들어오시며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꿈에서나 학수고대하던 선생님을 대구에 모시게 되었다. 2013년 겨울이었지 싶다. 원래 평화연대 사무실로 모시려다 공간이 협소해 계산동의 카메 라미아에밀리에서 가게 절반을 빌려서 진행 했다. 당시 우리는 선생님의 두 번째 비평집 『언어의 감옥에서(돌베개, 2011)』를 읽고 있었고 그 책을 중심으로 만남을 진행할 수 있었다. 우리 모임이 본색소사이어티라는 제법 그럴듯한 이름으로 개편되고도 한동안 우리의 서경식 읽기는 이어졌다.
그 무렵부터 난 선생님이 한국에 오신다 하면 내 형편 닿는 한 일정을 다 따라가려 노력했다. 그무렵 KTX를 참 지긋지긋하게 탔던거 같다. 합정에서 충정로에서, 부산시립미술관에서 포항시립미술관에서 등등 해에 최소 두번은 선생님을 뵈었던것 같다.
비록 직접 사사 받은 적 없어도 선생님은 그렇게 내 마음 속의 스승이셨고 사표셨다. 비판적 인문주의란 말이 성립하기 힘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생님의 마지막 한겨레 칼럼은 너무나도 무겁게 다가온다.
"모든 것이 천박해지고 비속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나처럼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사람이 그래도 한마디 충고를 한다면,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효율이나 속도보다 더 나은 다른 가치를 소중히 여겨 달라는 것이 될까. 말하자면 인문주의적 사고를 중히 여기고 인간미가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떠올려 보고 싶다. (왜 1967년 이후 정치적 실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팔레스타인 투쟁이 정의에 대해 질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의 승산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계속 말하려는 의지의 문제였습니다.”(<펜과 칼>)
우리도 승산이 있든 없든 ‘진실’을 계속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엄혹한 시대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말고, 얼굴을 들고, ‘진실’을 계속 얘기하자. 사이드만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천박함이나 비속함과는 거리가 먼, 진실을 계속 얘기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의 벗이다."(한겨레, 230706)
진실 조차 정파적 편의에 의해 재구축 되는 시대, 지성 보단 자극을 추종하는 이 무책임한 안락전체주의의 길로 흐르는 세상 속에서 선생님께서 한국의 민주화운동,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인권과 소수자들을 위한 여러 활동들 그 속에서 나온 여러 책들이 '이미 읽어버린 우리에게' 무엇인가 묻는것만 같다.
어제 오전에 흠애하는 이종찬 선배에게 황망한 부고를 전달 받고, 오전 내내 마치 뇌의 회로가 암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단어가 소리가 만들어지질 않았다. 그러다 점심 무렵 부터 미친놈 처럼 눈물이 쏟아진다. 선생님의 그 귀엽고 다정한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해보면 난 선생님과 둘이 찍은 사진 하나 없다. 휴대폰에 녹음 된 선생님의 강연이 있어 들어보는데, 선생님 특유의 그 말투에 말씀 하나하나 마다 하염없이 논물만 흐른다. 함께 나가노의 선생님 별장으로 가서 마지막 인사를 하자는 영민이형의 제안에 사양을 표하고 또 화장실에서 미친듯이 울었다.
아직도 5월이 되면 인천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오실것 같다. 분명 많이 노쇠해지셨지만 선생님의 그 예리하고 명철한 그러나 다정하고 귀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선생님은 떠나셨고 선생님의 글과 책들만이 덩그러이 남아 있다.
사람은 사건 경험 이전으로 회귀할 수 없다. 이미 봐버린, 이미 들어버린, 이민 느껴버린 이상 아무리 부정해도 사람 사건 이전과는 다른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미 읽어버린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한 사인으로 서경식과의 애정과 추억을 잘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로 서경식을 기억하는건 좀 다른 일일 수 밖에 없다. 읽어버린 자들의 책임이 무엇일까.
오늘 아침에 나가노로 떠나는 선배들께 관해서 일단 급한 대로 그 와중에 의견을 정리해서 전달하고 나누었다. 서경식을 읽어버린 이 커뮤니티 차원에서도 개인 차원에서도 생각이 길어질듯 하다.
여튼
일제 식민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만들어낸 경계인으로 살아내시며, 한국의 권위주의 독재정권으로 부터 수난을, 극우화 하는 일본 사회로 부터 고난을 겪어오신 선생님께서 먼저 가신 어머님과, 다른 가족들과 반갑게 해후 하셨기를, 일생의 동지이셨던 후나하시 유코 선생님의 안녕을, 함께 비통한 “읽어버린” 모두의 평안을 기원한다.
** 돌이켜 보면 선생님과 영민이형 덕에 촌동네 지식건달인 내가 원래라면 만날 수 없었을 분들과의 과분한 인연이 참 많이 생긴 것 같다. 또 선생님이나 선생님을 계기로 알게 된 여러 선배들과 대화 하고 있으면 나같은 이도 마치 지식인이 된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참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