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훈 Jul 16. 2024

스승의 유품을 물려 받는 일.


0.

1.

  서경식 선생님이 갑작스레 소천하신지 이제 정말 반년이 지났다. 5월 인천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는 사실상 한국에서의 선생님의 장례식이자 이 충격을 마주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위로하는 후나하시 선생님과 은희 선배의 음악회가 있었고, 여기저기서 조용하게 어떻게 선생님을 이어갈 것인가, 선생님의 숙제를 어떻게 우리의 방식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모색만이 이어지는듯 하다. 그런 와중에 6월, 후나하시 선생님이 한국을 오셨다.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오신 짧은 일정이셨지만, 월요일의 인천 디아스포라 영화제 팀들과의 식사에 영민햄, 덕구와 함께 동석하게 되었다. 영민이형과 아침 일찍(대게 내가 침대의 중력에 묶인 좀비 처럼 일어날 무렵에) 대구 모처에서 만나 태산준령을 가로지르는 곧디 곧은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날 우린 매우 흥미롭고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서경식 선생님을 보내드리는 과정에서 한일 간의 장의관에 대한 차이를 크게 느낄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장례식이라는 예식을 둘러싼 규범과 인식만 아니라 애도와 죽음,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 전반에 대해 느낀 차이일 것이다. 건전 가정의례 준칙 이래 우리에게 장의는 슬퍼하되 빨리 그 슬픔을 보내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가 겪은 일본은 애도의 과정이 길고 일상 속에서 밟는 듯 하다. 특히 유구나 분골을 빠르게 매장하지 않고 집에 봉안한 채 같이 생활하는 모습에서 느낀 놀라움, 왜 우리는 이리 빨리 보내는가에서부터 고인과 어떻게 같이 살아갈 수 있었을까에 대한 물음까지 우리가 지금 당연히 여기던 죽음의 의례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부고를 전하고 빈소를 차리는 형식도 우리는 하나의 표준화된 의례 체계 내에서 신속히 이뤄지는 데 비해 일본은 각자의 종교에서 집전하는 장의 의례를 따르거나, 혹은 각 가정의 고유한 의례들이 있는 느낌이었다.

  왜 이 차이를 이야기하냐면, 유품의 문제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장의를 마치고 3일, 4일 만에 출상하며 바로 탈상한다. 고인의 옷가지와 사진 등을 태우는 게 오늘날 우리에게 탈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소천 당시 신슈로 갔던 ‘서경식의 유령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서경식 선생님의 유품을 상속받았다. 요컨대 Y형은 서경식 선생님의 점퍼를 한국에 가져와 드라이크리닝하여 마치 고인의 위패를 모시듯 보관하고 있다.

2.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장편 <너의 이름은(2016)>은 매우 재미있는 방식으로 이 감각을 드러내준다. 극 중 주인공 타키와 미츠하는 꿈 속에서 서로가 되는 꿈을 꾸고, 더 나아가 시간의 엇갈림을 넘어 서로의 몸과 정신이 스위칭 되는 '되기'를 경험한다. 타키의 세계에서 이미 미츠하는 지난 운석 낙하로 인해 죽은 사람이지만, 그들이 경험하는 시공간의 엇갈림과 이어짐 속에서 그들은 만난다. 그 속에서 나오는 중요한 모티프 중 하나가 무스비다. 무녀 집안 출신인 미츠하에게 할머니는 무스비를 강조한다. 실을 잇는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 사람을 잇는것도 무스비. 그리고 신사의 무녀들이 손목에 하는 끈도 무스비라 한다. 극중에서 무스비는 신적인 필연성이며, 시공간의 어긋남에도 타키와 미츠하가 만나, 타키가 미츠하를 호명함으로써 미츠하와 마을 사람들이 운석 낙하의 재난을 피하게 되는 개연성의 장치다. 극중에서 타키와 미츠하를 잇는 두 가지 장치로써 손목의 끈매듭과 무녀들이 씹고 뱉어서 만드는 술이 나온다. 이 끈의 존재 속에서 둘은 다시 만나게 되고, 술을 만들고 그걸 마시는 행위 속에서 둘은 그저 꿈일수 있는 어긋남과 만남을 실제하게 만들었다.

  드니 빌뇌브의 영화 <Arrival(2017)>에서 극중의 에이미 아담스는 처음과 끝이 있는 선형적인 언어를 쓰는 인간이 극중의 원형적이고 끝과 시작이 없는 외계인의 언어를 배움으로 세계의 구조와 시간/삶을 새롭게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도 극중 에이미 아담스에게 고정 된 과거, 고정된 미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극중 빌뇌브가 만든 교묘현 연출, 과거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을 섞는,으로 드러난다. 단지 그 순간의 무언가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되는 것일까.  무교의 신적 요소를 걷어내고 보더라도 무스비라는 운동하는 관계의 유비, 즉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시간과 시간, 사물과 사물이 관계를 맺는 형태가 여러 선의 다발과 그것들의/그것들 간의 운행으로 파악하는 이런 인식은 일견 그저 재미있는 종교적 상상일지 모르지만, 한편으론 큰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에서 죽음이란 사건에는 더 이상 미래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능성의 끝이며, 하나의 세계가 닫힘으로서 이해된다. 하지만 무스비의 은유를 조금 비틀어보면, 고인이 되어버린 서경식 선생님과 우리의 관계는 선생님의 부고로써 닫혀버린 것 같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마치 타키가 미츠하 사후의 세계 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냈듯이,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쓰는가를 통해 서경식과 우리의 관계는 이어질 수 있다.서경식의 세계를 닫고 고정시키는 것은 그의 죽음이란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몫일지 모른다. 그런 무스비가 있기에 타키는 미츠하가 되고, 미츠하는 타키가 되어 서로를 가능성의 세계로 끌어낸다. 단지 애도와 호명 이상의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2.   더 이상 우리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을수 없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지구에서 나아간 음파들을 앞지르지 않는 한, 우리의 시공간의 어떤 음파의 대역에도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럼에도 선생님이 의미를 가진다면 그 중 하나는 선생님의 텍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선생님의 텍스트를 이어가조가 하는 이들의 존재일 것이다.

  넥타이란 것이 하나의 선이자 매듭이며 원형이기도 하다. 끝이 있을수도 있고 끝이 없을수도 있는 물건이다. 아마도 무스비가 그렇듯, 넥타이라는 상징처럼 선생님과 나, 선생님과 우리, 그리고 우리 동료들 모두 만나고 엇갈리고 애정하고 다투고 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몫으로 선생님을 이어가려 하지 않겠나. 그런 면에서 이처럼 고인의 옷과 넥타이를 상속받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서경식 되기/서경식 잇기의 참 좋은 매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옷을 입는다고 우리가 서경식이 될수는 없고, 서경식이 되어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고인이 된 선생님과 이어지지 않는것도 아니다. 누구도 거창한 후계자 같은 이름으로 선생님의 이야기를 닫고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공간 속에서 각자 보는 대로, 겪은 대로, 읽은 대로, 들은 대로 이야기하지 않겠나. 더욱이 나처럼 선생님과 같이 작업을 한것도 아닌 ‘참칭’에겐 더 없이 좋은 위로이자 격려 아니었나 싶다. 빙의와 교조  너머 어디선가 서경식을 이어 말하면서 동시에 자기 언어와 영역, 공간을 열어갈 우리 서경식 스쿨 동료들의 건필과 나의 건필을 기원하고 싶다. 선생님과의 세계 순례를 마치고 하나의 부적이 되어 내게 온 넥타이 앞에 또 어떤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

아 무스비 하니.....하와이안 무스비 먹고 싶네. 뭔가 더 고쳐서 좋은 이야길 그 생경한 느낌을 잘 살리고 싶은데, 필력이...아 배고파서 그란가.

매거진의 이전글 22.12.31. 다대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