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의 시대 6장

주목

by 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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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주목


기사 제목이 화면 위에 떠 있었다.


"55세 전 CTO, AI 에이전트로 제2의 인생 — 에이전틱 랩스, 3개월 만에 계약 10건 돌파"


박정호는 모니터를 응시한 채 커피를 마셨다. 7월의 판교. 에어컨이 서버 랙의 열기를 겨우 이기고 있는 사무실. 성수동 공유오피스에서 이사한 지 두 달이 지났고, 공간은 여전히 좁았지만 사람과 에이전트의 밀도는 제법 빽빽해져 있었다.


"아빠, 이거 봤어?" 지수가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 화면에는 같은 기사가 열려 있었다. "댓글 반응 괜찮은데? '진짜 레전드다' '이런 게 한국판 실리콘밸리 아니냐' 이런 거."


"댓글은 보지 마라."


"왜? 좋은 댓글인데."


"좋은 댓글이든 나쁜 댓글이든 보면 신경 쓰이니까." 정호가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세 번 읽었다. 기사의 톤이 마음에 걸렸다. '제2의 인생'이라는 프레이밍. 55세라는 숫자를 강조하는 방식. 미담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그 아래에는 '나이 든 사람도 할 수 있다'는 동정 반 경탄 반의 시선이 깔려 있었다.


중요한 건 기사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실적이었다.


3개월 동안의 성과를 정호는 숫자로 기억했다. 계약 11건. 제조업 공정 최적화 4건, 물류 시스템 재설계 3건, 금융 리스크 분석 2건, 의료 데이터 파이프라인 1건, 그리고 지자체 행정 자동화 1건. 규모는 작았다. 중소기업과 공공기관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프로젝트마다 기존 컨설팅 대비 기간은 5분의 1, 비용은 3분의 1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입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두 번째 달부터였고, 세 번째 달에는 계약 의뢰가 처리 용량을 초과하기 시작했다.


"정호 씨." 서연이 자리에서 고개를 돌렸다. 모니터 세 개가 동시에 코드를 스크롤하고 있었다. "SK머티리얼즈 쪽에서 추가 모듈 요청이 왔어요. 아리아가 초안을 뽑아놨는데 검토 좀 해줄래요? 산업 맥락은 정호 씨가 나보다 나으니까."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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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는 아리아가 생성한 제안서를 출력해 살펴 보았다. 반도체 소재 공정의 불량률 예측 모델. 기술적 설계는 흠잡을 데 없었다. 하지만 정호의 눈은 다른 곳에 멈췄다. 제안서의 ROI 산출 방식이 대기업 재무팀의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숫자는 맞지만 설득의 구조가 틀렸다.


"아리아, ROI 섹션을 수정해야 합니다. 대기업 재무팀은 순수익률보다 리스크 조정 수익률을 먼저 봅니다. 불량률 감소에 따른 직접 비용 절감보다, 품질 리콜 리스크 제거에 따른 간접 비용 절감을 앞에 배치해주세요."


이해했습니다. 리스크 조정 관점으로 재구성하겠습니다. 정호 님, 한 가지 확인 — 넥스젠 반도체 사업부 시절에도 이런 프레임을 사용하셨나요?


정호는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넥스젠.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흉골 뒤쪽이 조여드는 감각은 여전했다.


"네. 넥스젠 반도체 부문도 같은 방식입니다. 재벌 그룹 재무팀의 DNA라고 보시면 됩니다."


서연이 옆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넥스젠 시절 경험이 지금 이렇게 쓰이는 거 보면 좀 아이러니하지 않아요?"


"아이러니가 아니라 자원 재활용입니다." 정호가 말했다. 서연이 피식 웃었다.



8월 셋째 주. 정호의 휴대폰에 낯선 번호가 떴다. 미국 번호였다.


"Is this Jeong-ho Park? This is Mark Chen from NeuroSync Ventures."


정호는 그 이름을 알았다. 마크 첸. 실리콘밸리에서 AI 에이전트 플랫폼을 개발하는 뉴로싱크 벤처스의 창업자. 스탠퍼드 AI 랩 출신. 최근 시리즈B로 2억 달러를 유치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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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박정호입니다."


"아, 한국어 해도 되죠? 저 한국어 좀 해요. Mom이 한국 사람이라서." 마크의 한국어는 유창했지만 억양이 묘하게 미국식이었다. 모음이 평평하고 문장 끝이 올라갔다. "에이전틱 랩스 소식 들었어요. Impressive. 한국 시장에서 3개월 만에 그 트랙션 만든 거, 진짜 대단해요."


"감사합니다."


"Actually, 제가 전화한 건 단순히 축하하려는 게 아니에요. 우리 쪽에서도 비슷한 걸 하고 있거든요.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 다만 우리는 미국 시장이랑 유럽 시장에 포커스하고 있고, 아시아 쪽은 아직 — you know — 좀 약해요."


정호의 귀가 세워졌다. 사업 제안이 올 때의 촉. 30년 동안 수백 번 겪었던 감각이었다.


"제안이 있으신 겁니까?"


"Proposal이라기보다는 conversation이에요." 마크가 말했다. "서로 뭘 하고 있는지 공유하고, synergy가 있는지 한번 보자는 거죠. Competition보다는 collaboration이 더 smart한 시대잖아요."


"언제 한국에 오십니까?"


"다음 주에 서울 갈 예정이에요. 서연이도 만나고 싶어요. 오랜만이니까."


정호의 손이 전화기를 쥔 채 멈췄다. 서연이도.


"이서연 씨를 아십니까?"


잠깐의 침묵. 마크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여전히 밝았지만, 어떤 무게가 실렸다.


"Stanford에서 같이 있었죠. 짧게. 그 후에 서연이가 — well, 한국으로 돌아간 건 알고 있어요. 이유는... 뭐, 서연이한테 직접 들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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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은 후 정호는 한참 창밖을 바라봤다. 판교 테크노밸리의 유리 건물들이 8월의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마크 첸이 서연의 과거를 아는 뉘앙스. 스탠퍼드에서 '짧게' 같이 있었다는 표현. 서연이 실리콘밸리에서의 일을 언급할 때마다 말을 돌리던 것이 떠올랐다. 실리콘밸리에서 비슷한 시도를 했는데... 그리고 입을 닫았던 순간.


서연에게 바로 물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호는 묻지 않기로 했다. 아직은.



다음 주 화요일. 마크 첸이 판교 사무실을 방문했다.


첫인상은 정호의 예상과 달랐다. 실리콘밸리 창업자라면 후드티에 슬리퍼를 기대했는데, 마크는 깔끔한 옥스포드 셔츠에 치노 팬츠 차림이었다. 서른다섯 살. 날카로운 눈에 쉽게 웃는 입. 방에 들어오자마자 에너지가 달라지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Seo-yeon!" 마크가 서연을 보자 양팔을 벌렸다. 영어로 전환됐다. "It's been, what, five years?"


서연의 반응이 정호의 시선을 끌었다. 미소는 지었지만, 눈이 웃지 않았다. 평소에 기술 이야기를 할 때 불꽃처럼 빛나던 눈이 납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래됐지." 서연이 한국어로 답했다. 의도적인 언어 전환이라는 걸 정호는 감지했다. 거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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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아랑곳하지 않는 척했다. 곧 비즈니스 모드로 전환됐다.


"Our platform, NeuroSync Agent OS, 지금 미국에서 Fortune 500 기업 열두 곳이 쓰고 있어요." 마크가 노트북을 열며 말했다. "아키텍처가 에이전틱 랩스랑 비슷해요. 근데 우리는 enterprise에 최적화했고, 당신들은 SMB랑 공공에 강한 것 같아. Complementary하다고 봐요."


"그래서 뭘 제안하고 싶은 건데?" 서연이 물었다. 직설적이었다.


"기술 제휴. 우리 Agent OS 위에 아리아를 올리는 거야. API 통합하면 돼. 그러면 당신들은 글로벌 시장에 나갈 수 있고, 우리는 아리아의 오케스트레이션 능력을 leverage할 수 있어."


정호가 끼어들었다. "수익 배분은?"


마크가 정호를 봤다. 잠깐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마도 기술 토론을 예상했을 것이다.


"Detail은 협상할 수 있어요. 기본적으로 7:3. 우리 플랫폼 통해 나가는 매출이니까 우리가 7."


"반대라면 모를까." 서연이 말했다.


마크가 웃었다. "See? 이래서 서연이랑 비즈니스는 항상 interesting해."


정호는 마크의 웃음 너머를 읽으려 했다. 30년의 습관이었다. 상대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기술 제휴? 그건 표면이었다. 마크가 원하는 건 아리아의 아키텍처에 대한 접근이었다.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 기술의 핵심. 서연이 밤을 새워가며 혼자 쌓아올린 것.


"마크 씨." 정호가 말했다. "좋은 제안입니다. 내부에서 검토해보겠습니다."


"Take your time. 근데 너무 오래는 안 됐으면 좋겠어요." 마크가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 "이 시장, 윈도우가 빠르게 닫히고 있으니까."


마크가 떠난 후, 사무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생각해요?" 서연이 먼저 물었다. 의자를 돌려 정호를 마주 봤다.


"기술 제휴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7:3은 말이 안 되고, 그보다 — " 정호가 말을 골랐다. "마크 첸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가 중요합니다."


서연이 한참 정호를 바라봤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서연 씨." 정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크 첸과의 관계는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비즈니스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알아야 할 때 알려주십시오."


서연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게 전부였다.



서울 여의도. 넥스젠 그룹 본사 52층. 회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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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우는 통유리 너머의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 뒤로 비서실장의 보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에이전틱 랩스의 3분기 추정 매출은 약 15억 원입니다. 규모 자체는 아직 넥스젠 디지털 사업부 매출의 0.3%에도 미치지 않습니다."


현우는 돌아보지 않았다. 한강 위를 유람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느린 것이 거슬렸다.


"결론만 말해."


비서실장이 헛기침을 했다. "문제는 매출 규모가 아니라 성장률입니다. 월 평균 40% 성장. 이 추세면 연말 누적 매출이 50억을 넘을 수 있고, 내년에는 — "


"내년은 됐고." 현우가 돌아섰다. 은테 안경 뒤의 눈이 차가웠다. "그래서 우리한테 뭐가 남아?"


비서실장이 태블릿의 슬라이드를 넘겼다. "에이전틱 랩스의 클라이언트 목록입니다. 현재 확인된 11건 중 4건이 넥스젠 계열사 또는 주요 협력사의 기존 고객입니다. SK머티리얼즈, 한국중공업, 세진메디칼, 인천시."


침묵.


현우가 의자에 앉았다. 천천히. 맞춤 정장의 어깨 라인이 미동 없이 유지되었다.


"박정호가." 현우가 이름을 말했다. 입에서 나온 그 세 글자가 회장실의 공기를 변질시켰다. "내 CTO였던 놈이. 고문직을 거절하더니, 스타트업을 차려서, 내 고객을 뺏아가고 있어?"


"직접적인 경쟁은 아닙니다. 에이전틱 랩스가 수주한 프로젝트 영역은 저희 디지털 사업부가 아직 커버하지 못하는 — "


"김 실장."


"예."


"내가 '아직 커버하지 못하는'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것 같아?"


비서실장이 입을 다물었다.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시 걸어갔다. 걸음이 빨랐다. 수행원들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그 특유의 걸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방 안에 혼자였고 — 비서실장은 혼자가 아닌 것으로 치니까 — 그 빠른 걸음은 목적지 없이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다.


"박정호를 내가 키웠어." 현우가 말했다. 한강을 향해. "부장 때 데려와서 상무로 올리고, 전무 건너뛰고 부사장에 앉혔지. 그룹 역사상 기술직 출신 부사장이 있었어? 내가 만든 자리야."


비서실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 없는 말이라는 걸 20년 경력이 알려주고 있었다.


"자네도 알잖아." 현우가 돌아봤다. "배은망덕한 건 참을 수 있어. 근데 우리 시장을 건드리는 건 다른 문제야."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현우가 넥타이를 매만졌다. 넥스젠 로고가 새겨진 금색 핀이 형광등 아래에서 빛났다.


"디지털 전환팀 팀장 불러. 그리고 전략기획실도." 현우가 말했다. "에이전틱 랩스가 뭘 하고 있는지, 어디에 영업하고 있는지, 누구한테 투자받고 있는지 전부 파악해. 일주일."


"네."


"그리고 — " 현우가 잠시 멈췄다. "한국중공업 이 사장한테 전화해. 오늘 중으로."


한국중공업. 에이전틱 랩스의 핵심 클라이언트 중 하나였다. 동시에 넥스젠 반도체의 장비 공급사이기도 했다. 공급 관계에서 넥스젠이 갑인 구도. 현우는 그 관계를 정확히 꿰고 있었다.


비서실장이 나간 후, 현우는 혼자 의자에 앉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이 방에 앉아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책상 위에 서류 대신 골프 트로피가 놓여 있던 말년. 형이 그룹에서 축출된 날, 아버지는 이 의자에 앉아서 한마디만 했다. 사업은 가족이 아니야. 그 말을 들으며 스물아홉의 현우는 맹세했다. 절대로 통제력을 잃지 않겠다고.


AI 에이전트. 자연어로 명령하면 알아서 움직이는 기계. 인간의 관리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시스템. 현우의 내장이 반응했다. 통제할 수 없는 것. 예측할 수 없는 것. 넥스젠의 20개 계열사, 8만 명의 직원은 현우의 결재 라인 아래에서 움직였다. 한 번의 지시로 수천억이 이동하고, 한 통의 전화로 임원이 교체됐다. 이것이 현우가 아는 세계의 질서였다.


그런데 박정호가 — 자기 밑에서 20년을 일한 남자가 — 그 질서의 바깥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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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는 서랍에서 담배를 꺼냈다. 금연한 지 5년이었다. 담배를 입에 물지는 않고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굴렸다. 생각할 때의 습관이었다.


그 스타트업을 밟는 건 어렵지 않다. 클라이언트에 압력을 넣고, 투자자를 차단하고, 인재를 빼가면 된다. 재벌이 할 수 있는 일의 목록은 길었다.


하지만 박정호가 문제였다. 넥스젠의 기술 조직을 15년간 이끈 사람. 업계 인맥이 넓고, 정관계에도 연결이 있다. 노골적으로 밟으면 여론이 불리해질 수 있다. '55세의 재도전'을 응원하는 기사가 이미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현우는 담배를 서랍에 다시 넣었다.


조용히. 천천히.



9월이 되자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국중공업에서 전화가 왔다. 2차 프로젝트 논의를 위해 잡아둔 미팅이 '내부 사정'으로 무기한 연기됐다는 통보였다. 담당 이사의 목소리가 어색했다.


"죄송합니다, 박 대표님. 저희도 만족스러웠는데... 좀 복잡한 상황이 생겨서요."


"어떤 상황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좀..." 말끝이 흐려졌다. "제가 말씀드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요."


같은 주에 세진메디칼에서도 연락이 왔다. 진행 중이던 의료 데이터 파이프라인 프로젝트의 예산이 동결됐다는 내용이었다. 이유는 '경영진 판단'이라는 모호한 표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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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는 사무실 구석의 회의 공간에서 서연과 마주 앉았다.


"두 건 다 공교롭게도 넥스젠 계열사와 거래 관계가 있는 곳이에요." 서연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져 있었다. 감정이 격해지면 목소리가 낮아지는, 서연 특유의 반응이었다.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죠."


"우연이 아닙니다." 정호가 말했다. "최현우 회장의 방식입니다."


정호는 넥스젠에서 15년을 일하면서 그 방식을 숱하게 봤다. 전화 한 통. 식사 한 번. 직접적인 위협은 하지 않는다. 다만 거래 관계의 무게를 상기시킬 뿐. '물론 자유롭게 선택하시면 됩니다'라는 말 뒤에 숨은 침묵. 그 침묵의 무게를 아는 사람은 스스로 판단을 내린다.


"대응할 방법이 있어요?" 서연이 물었다.


"단기적으로는 어렵습니다." 정호가 솔직하게 말했다. "넥스젠 생태계와 겹치는 클라이언트는 추가 이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매출의 35%가 — "


"알고 있습니다." 정호가 말을 잘랐다. 자신이 말을 자른다는 것을 의식했다. 6개월 전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스타트업의 속도가 그를 바꾸고 있었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넥스젠 생태계 밖의 시장을 빠르게 개척하는 것. 다른 하나는 — "


그때 아리아의 인디케이터가 화면 구석에서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정호와 서연 모두의 모니터에 동시에 알림이 떴다.


팀 공유 사항이 있습니다. 최근 48시간 동안 에이전틱 랩스의 잠재 클라이언트 12곳 중 4곳에서 동시에 접촉 중단 패턴이 관찰되었습니다. 시간대, 접촉 중단의 방식, 사용된 표현("내부 사정", "경영진 판단", "당분간 보류")의 유사성으로 미루어, 외부의 조율된 개입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관련 기업들의 공통 거래처를 분석한 결과, 넥스젠 그룹 계열사와의 거래 비중이 평균 42%입니다.


서연이 화면을 바라봤다. 정호도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이거 아리아한테 분석 지시한 적 있어요?" 서연이 물었다.


"없습니다." 정호가 말했다.


서연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없어."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리아가 독자적으로 분석한 거네."


두 사람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아리아의 자기 반성 루프. 지시받지 않은 분석. 기업의 방해 패턴을 스스로 감지하고 보고한 행동. 이서연이 설계한 아키텍처의 산물이었지만, 이런 수준의 자율적 판단은 예상 범위의 경계에 있었다.


정호가 먼저 시선을 거뒀다. 지금은 아리아의 자율성에 대해 논의할 때가 아니었다.


"서연 씨. 두 번째 방법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뭔데요?"


"넥스젠이 건드릴 수 없는 규모의 프로젝트를 따내는 겁니다."



9월 마지막 주. 정부조달포털에 입찰 공고가 올라왔다.


[세종시 스마트시티 통합 플랫폼 구축 사업]

발주처: 국토교통부, 세종특별자치시 사업 기간: 2030년 1월 — 2031년 12월 (24개월) 예산: 830억 원 주요 내용: 교통, 에너지, 행정, 안전, 환경 5개 분야의 AI 에이전트 기반 통합 운영 플랫폼


정호는 모니터 앞에서 공고문을 세 번 읽었다. 830억. 에이전틱 랩스의 연 매출 전망치의 열여섯 배. 상식적으로 8명짜리 스타트업이 도전할 규모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호의 눈은 다른 곳을 읽고 있었다. 'AI 에이전트 기반'이라는 조건. 기존 SI 업체의 방식으로는 충족하기 어려운 요건이었다. 대기업이 이 프로젝트를 수주해도 결국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을 가장 앞서서 상용화한 곳이 에이전틱 랩스였다.


"이거 봐요." 정호가 서연을 불렀다.


서연이 화면을 스캔했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건 정보를 처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830억." 서연이 말했다. "미쳤죠?"


"미쳤습니다." 정호가 동의했다.


"넥스젠도 넣겠죠?"


"당연히 넣을 겁니다. 넥스젠 스마트시티 사업부가 있으니까."


서연이 의자를 돌려 정호를 마주 봤다. "솔직히 물어볼게요. 우리가 이길 수 있어요?"


정호는 잠시 생각했다. 데이터를 봤다. 그리고 데이터 너머를 봤다. 30년의 경험이 읽어내는 것. 정부 조달의 논리. 평가 위원회의 구성. 기술 점수와 가격 점수의 배점. 대기업이 유리한 영역과 불리한 영역.


"이기는 건 장담 못 합니다." 정호가 말했다. "하지만 우선협상대상자에 오를 수는 있습니다. 기술 평가에서 압도하면."


"기술 평가라면 자신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기술은 서연 씨 영역이고, 입찰 전략은 제 영역입니다. 맡겨주시겠습니까?"


서연이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모니터를 향했다. 이미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리아에게 세종시 스마트시티의 기존 인프라 데이터를 요청하는 명령이 화면에 찍혔다.


정호도 자리로 돌아갔다. 전화기를 들었다. 넥스젠 시절의 연락처가 아직 살아 있었다. 국토부 차관보 김성태. 세종시청 스마트도시과장 박미영. 한국정보화진흥원 부원장 이재원. 전화를 걸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이 네트워크를 쓴다는 건, 30년의 자산을 소모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 번 쓰면 줄어드는 종류의 자본.


하지만 지금이 그때였다.


첫 번째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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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9월의 노을이 판교의 유리 건물들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어디선가 서연의 키보드 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모니터 구석에서 아리아의 인디케이터가 초록색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넥스젠 방해 패턴의 다음 단계를 예측하는 연산이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정호는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걸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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