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에서
성수동 공유오피스의 문을 열자 커피 냄새와 3D 프린터의 수지 냄새가 뒤섞여 밀려왔다. 이서연은 복도 끝 회의실을 지나치며 유리벽 너머를 흘깃 보았다. 스물세 평. 책상 네 개, 모니터 여섯 대, 벽면 화이트보드 하나. 에이전틱 랩스의 전부였다.
4월의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왔다. 서연은 후드티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법인 등기를 마친 지 열흘. 공동대표 이서연, 박정호. 자본금 삼억. 판교의 원룸 작업실에서 여기로 옮겨온 것만으로도 확장이라면 확장이었다.
엔지니어 두 명이 먼저 와 있었다. 한지우, 스물여덟. 전 네이바 ML 엔지니어. 강민혁, 서른둘. 전 카나오 백엔드 개발자. 둘 다 서연의 밋업 발표를 보고 연락해온 사람들이었다.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온 눈빛이 서연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아리아, 오피스 셋업 상태 보여줘."
모니터 위의 인디케이터가 연한 파란색으로 깜빡였다.
개발 에이전트 클러스터 12개, 비즈니스 에이전트 8개, 오케스트레이션 에이전트 3개 가동 중입니다. 네트워크 상태 정상. 다만, 공유오피스 와이파이 대역폭이 에이전트 동시 작업에는 부족합니다. 전용 회선을 고려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돈이 있으면 그러지." 지우가 중얼거렸다.
서연이 웃었다. 이 팀이 좋았다. 보고서가 아니라 농담으로 하루가 시작되는 조직. 넷이서 에이전트 스물셋 개와 일했다. 인간 네 명, 에이전트 스물셋. 이것이 서연이 꿈꾸던 비율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박정호가 들어왔다. 깔끔하게 다림질된 셔츠에 캐주얼 재킷. 넥타이는 없었지만, 구두는 여전히 옥스퍼드였다. 손에는 종이컵 다섯 개가 든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커피 사왔습니다."
서연은 정호를 관찰했다. 두 달째 같이 일하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이 사람은 출근이 빠르다. 대기업 습관이겠지만, 여기서 가장 먼저 온다. 커피를 직접 사온다. CTO 시절에는 비서가 가져다줬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리에 앉으면 곧장 노트북을 열어 아리아에게 업계 동향 브리핑을 요청한다. 배우려는 사람의 동작. 서연은 그 노력이 진짜라는 것을 안다. 다만 —
"정호 씨, 어제 보낸 주간 브리핑 문서요."
"읽었습니다. 의견 남겨뒀어요."
서연은 화면을 열었다. 정호의 코멘트가 빼곡했다. 프로젝트별 리스크 분류, 고객 파이프라인 우선순위 매트릭스, 재무 지표 대시보드 제안. 깔끔하고 체계적이었다. 넥스젠의 전략기획실에서 나올 법한 문서.
"이걸 다 어젯밤에 쓴 거예요?"
"아리아한테 프레임워크를 잡아달라고 하고, 내용은 내가 채웠습니다."
서연은 화면을 스크롤했다. 잘 만든 문서였다. 문제는 — 지금 이 팀에 이런 문서가 필요한가, 였다.
"정호 씨." 서연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 문서에 쓴 시간이면 프로토타입 하나 더 돌릴 수 있었어요."
정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한 번 접혔다 폈다.
"의사결정의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의사결정은 프로토타입 결과로 하면 돼요. 문서는 결과 나온 다음에 아리아한테 정리시키면 되고."
침묵이 흘렀다. 지우와 민혁이 시선을 교환했다. 서연은 자신이 너무 직설적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고치고 싶지는 않았다.
정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알겠습니다."
서연은 그 세 글자 뒤에 숨겨진 것을 읽었다. 수긍이 아니라 보류. 30년간 조직을 이끌어온 사람이 "알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건 동의가 아니라 관찰이다.
첫 프로젝트는 예상보다 빨리 왔다.
경기도 안산의 중소 제조업체 성진정밀. 자동차 부품 가공 라인의 불량률이 3%를 넘기고 있었다. 대형 컨설팅사에 문의했더니 견적이 2억, 기간 6개월. 성진정밀의 박 사장은 넥스젠 시절 정호의 2차 협력사 네트워크에 있던 사람이었다.
"정호 형, 솔직히 우리 같은 데가 억 단위 컨설팅을 받을 형편이 안 돼요."
정호가 서연을 보았다. 서연의 눈이 '해보죠'라고 말하고 있었다.
"3주 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정호가 말했다.
전화를 끊고 서연이 물었다. "3주라고 한 근거가 뭐예요?"
"근거라기보다 직감입니다. 제조 공정 데이터가 있으면 아리아가 패턴을 찾을 수 있을 거고, 문제는 데이터 확보와 현장 적용이에요. 현장 적용은 내가 압니다."
서연은 인정해야 했다. 기술은 자신이 앞서지만, "현장"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정호 쪽에 있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언어, 공장장의 심리, 라인 작업자들의 저항감. 코드로는 풀 수 없는 것들.
그날 밤부터 에이전틱 랩스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낮에 다녀온 성진정밀의 냄새가 아직 코에 남아 있었다. 절삭유의 금속성 냄새, 공장 바닥의 기름기. 서연은 아리아에게 공정 데이터를 분석시켰다. 센서 로그 200만 건. 아리아가 패턴을 찾는 데 네 시간이 걸렸다. CNC 선반 3호기의 절삭유 온도가 특정 구간에서 불안정해지는 시점과 불량 발생 시점이 0.94의 상관계수로 겹쳤다.
"이거야." 서연이 화면을 가리켰다. 새벽 세 시. 눈가에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정호가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절삭유 온도 제어 모듈을 바꾸면 되는 건가?"
"하드웨어 교체 없이 소프트웨어로 해결할 수 있어요. 온도가 임계점에 가까워지면 가공 속도를 자동 조절하는 에이전트를 심으면 돼요. 아리아, 제어 로직 프로토타입 만들어줘."
예상 소요 시간 45분입니다.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말해."
제어 로직만으로도 불량률을 낮출 수 있지만, 작업자 교대 시간 전후의 데이터를 보면 인적 요인도 유의미합니다. 교대 직전 30분간 불량률이 1.7배 상승합니다. 이 패턴을 작업자에게 전달하는 대시보드를 함께 제공하면 효과가 더 클 것 같습니다.
서연이 정호를 보았다. 정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은 포인트야. 근데 작업자들한테 '데이터가 니 문제라고 말한다'고 하면 반발이 생겨요. 대시보드의 프레이밍이 중요합니다. '당신을 모니터링한다'가 아니라 '당신을 도와준다'로 가야 해요."
서연은 속으로 인정했다. 이럴 때 정호가 필요한 이유를 체감했다.
2주 뒤, 성진정밀의 라인에 에이전트가 올라갔다. 첫 주 불량률이 3.2%에서 0.8%로 떨어졌다. 박 사장이 전화를 걸어 왔을 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호 형, 이게 말이 돼요? 2억짜리를 3주 만에?"
정호는 스피커폰을 켜놓고 팀원들을 바라봤다. 지우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민혁이 조용히 박수를 쳤다. 서연은 — 웃고 있었다. 다크서클째 웃고 있었다.
5월 중순, 에이전틱 랩스는 판교의 소규모 사무실로 이전했다. 공유오피스의 와이파이로는 더 이상 에이전트 클러스터를 감당할 수 없었다. 정호가 네트워크를 확보했다. 서연은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몰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정호의 세계에는 서연이 접근할 수 없는 문이 있었다. 전화 한 통에 사무실이 구해지고, 점심 한 끼에 투자 미팅이 잡히는 세계.
문제는 그 세계의 문법이 에이전틱 랩스로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번 주 미팅 아젠다 정리해봤습니다."
정호가 슬랙에 올린 파일을 서연이 열었다. 주간 경영회의 아젠다. 참석자, 안건, 예상 소요 시간, 후속 조치 담당자. 넥스젠 양식이 거의 그대로였다.
서연은 슬랙에 한 줄을 쳤다.
우리 넷이서 무슨 경영회의를 해요. 점심 먹으면서 얘기하면 되잖아요.
정호의 답이 왔다.
"의사결정 기록이 남아야 합니다. 나중에 투자자 실사 때 필요해요."
서연은 타이핑하다 멈췄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 항상 필요한 말은 아니다. 이 순간 팀에 필요한 건 회의록이 아니라 속도였다.
서연 님, 한 가지 관찰 사항이 있습니다.
아리아의 메시지가 서연의 개인 채널에 떴다.
정호 님이 제안하신 의사결정 기록 체계를 간소화해서 적용하면, 양측의 우려를 동시에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의 대신 비동기 코멘트 방식으로, 기록은 자동 생성되고, 속도는 유지되는 구조입니다. 제가 템플릿을 만들어볼까요?
서연은 화면을 바라봤다. 아리아가 팀의 갈등을 읽고, 중간 지점을 제안하고 있었다. 프로그래밍된 기능이 아니었다. 자기 반성 루프가 대인 관계의 맥락까지 확장된 것이다.
"만들어봐." 서연이 답했다.
그 템플릿은 다음 날부터 팀의 기본 도구가 됐다. 정호는 기록이 남는 것에 만족했고, 서연은 회의가 없는 것에 만족했다. 누가 양보한 건지 아무도 모른 채 갈등이 녹았다. 아리아의 인디케이터가 잠깐 초록색으로 빛난 것을 서연만 보았다.
6월 첫째 주. 판교 사무실에 새 얼굴이 나타났다.
"아빠, 여기 인터넷 진짜 빠르다."
박지수. 스물여섯. 경영학 전공에 바이브코딩으로 카페 추천 앱을 혼자 만든 아이. 이번 학기 인턴십 학점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서연은 다른 이유를 짐작했다. 아버지가 뭘 하고 있는지 직접 보고 싶은 것이다.
정호의 표정이 복잡했다. 서연이 그것을 읽었다. 자부심과 불안. 딸에게 무능해 보이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본능.
"지수 씨." 서연이 말했다. "여기선 인턴도 에이전트 팀을 운영해요. 아리아한테 직접 프로젝트 하나 맡아볼래요?"
지수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요?"
서연은 정호를 슬쩍 보았다. 정호가 입을 열려다 닫았다. '아직 이르지 않나'라는 말을 삼킨 것이 보였다. 서연은 의도적으로 정호의 개입을 차단한 것이었다. 여기서 지수가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한 명의 팀원이 되는 것. 그것이 둘 모두에게 필요했다.
지수는 이틀 만에 아리아와 협업하여 성진정밀 사후 보고서 자동 생성 시스템을 만들었다. 바이브코딩으로 기능을 정의하고, 아리아가 코드를 짜고, 지수가 UX를 다듬었다. 정호가 3일 걸려 엑셀로 정리하던 데이터를 지수의 시스템이 30초에 처리했다.
정호는 화면을 오래 들여다봤다. 턱을 받친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잘 만들었네." 말이 짧았다.
지수가 웃었다. "아빠, 바이브코딩 배워봐. 내가 가르쳐줄게."
딸이 아버지에게 기술을 가르치겠다고 말하는 순간. 서연은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정호의 표정을 더 보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성진정밀 성공 소식이 중소 제조업 커뮤니티에 퍼지기 시작한 건 6월 말이었다. 문의 전화가 하루에 세 건씩 들어왔다. 에이전틱 랩스는 아직 네 명이었지만 — 아니, 인간 다섯, 에이전트 서른여섯이었지만 — 할 수 있는 것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정호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업계 뉴스 피드에 에이전틱 랩스의 이름은 아직 없었다. 대신 넥스젠 관련 기사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넥스젠, 차세대 AI 전략 "프로젝트 오라클" 가동 — 최현우 회장 직접 진두지휘'. 기사 내용은 구체적이지 않았다. 코드네임만 떠 있었다. 프로젝트 오라클.
정호는 화면을 끄고 창밖을 보았다. 판교역을 지나는 전동차의 불빛이 어둠 속을 흘렀다. 오라클. 신탁. 최현우다운 이름이었다. 미래를 예측하겠다는 의지 — 아니, 미래를 통제하겠다는 의지.
오피스 불을 끄기 전, 마지막으로 슬랙을 확인했다. 아리아가 자정에 올린 메시지가 있었다. 전체 채널이 아니라 팀 리더 전용 채널에.
오늘 지우 님과 민혁 님의 코드 리뷰 과정에서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기술적 쟁점은 이미 해소되었지만, 대화 패턴을 보면 감정적 잔여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내일 오전에 가벼운 자리를 마련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정호는 그 메시지를 두 번 읽었다. AI가 팀원들의 감정적 갈등을 감지하고 리더에게 조율을 제안하고 있었다. 30년간 부서장, 본부장, 부사장을 하면서 이런 역할을 해온 건 자신이었다. 조직의 미묘한 긴장을 읽고, 적절한 타이밍에 개입하는 것. 그것을 이제 AI가 한다.
불편해야 했다. 그런데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 이 에이전트와 함께라면, 자신의 30년이 증폭될 수 있다는 감각이 왔다.
정호는 아리아에게 답했다.
"고맙습니다. 내일 아침에 팥빙수라도 사가겠습니다."
6월 기온을 고려하면 좋은 선택입니다.
정호가 작게 웃었다. 빈 사무실에서 혼자, 화면을 보며 웃는 쉰여섯의 남자. 그 모습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 아마 좋은 신호일 것이다.
판교의 밤은 성수동의 밤과 달리 조용했다. 스타트업들의 불빛 대신, 아파트 단지의 균일한 노란 빛이 능선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정호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다. 제로에서 시작한 지 석 달. 손에는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었다. 하지만 삼십 년 전 상자 하나를 들고 넥스젠 로비를 나서던 밤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
방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