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의 시대 4장

결단

by 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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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결단


회장실은 여의도 넥스젠 본사 최상층에 있었다. 박정호는 이 복도를 수백 번 걸었다. 짙은 회색 카펫, 간접 조명, 벽면의 창업주 초상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자신뿐이었다. 두 달 전까지 이 복도를 걸을 때는 직원들이 먼저 인사했다. 지금은 스쳐 지나가는 젊은 직원들의 시선에서 미묘한 당혹감이 읽혔다. 전 부사장이 왜 여기에.


비서실장이 문을 열어주었다. 한쪽 벽면 전체가 유리창이어서 여의도 시가지가 내려다보였다. 반대쪽 벽에는 넥스젠의 첫 양산 반도체 웨이퍼가 액자에 담겨 있었다.


최현우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은테 안경 뒤의 눈이 정호를 훑었다. 캐주얼 재킷. 넥타이 없음. 현우의 입꼬리가 꿈틀했다.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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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반말. 20년간 그랬다. 정호가 부사장이던 시절에도 현우는 반말이었다. 정호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커피 잔이 놓여 있었다. 비서가 미리 준비한 것이다.


"잘 지내나?" 현우가 물었다. 안부를 묻는 말이 아니었다. 뭘 하고 있냐는 뜻이었다.


"네, 이것저것 보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현우가 되풀이했다. 커피잔을 들지 않았다. "성수동 밋업에 갔다며?"


정호는 놀라지 않았다. 넥스젠 출신이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현우에게는 보고가 올라왔다.


"네. AI 관련 밋업이었습니다."


"이서연이라는 여자." 현우가 말했다. "바이브코딩 데모한 사람. KAIST 나와서 스탠퍼드 중퇴."


"잘 알고 계시네요."


"내가 모르는 게 뭐야." 사실을 진술하는 톤이었다. "그래서 내가 불렀어. 제안이 하나 있어."


현우가 소파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안경 너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고문이야. 그룹 기술 고문. 월 천오백에 차량 지원. 연 네 번 이사회 참석. 디지털 전환 관련 자문. 자네 경험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정호는 커피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서 맛을 느낄 여유를 스스로에게 주었다.


월 천오백만 원. 차량. 이사회 참석. 겉보기에는 파격이었다. 하지만 정호는 20년간 최현우 옆에서 일했다. '고문'이 무엇인지 알았다. 김 전무가 고문이 됐을 때, 이 전무가 고문이 됐을 때, 그들은 어떻게 됐나. 고급스러운 서재에 넣어두는 장식품. 밖으로 나가서 경쟁사에 가는 것보다는 안에 묶어두는 편이 나으니까.


"감사합니다, 회장님."


"고마울 거 없어. 자네가 15년간 한 게 있으니까." 현우가 말했다. 여기까지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봐. 급하지 않아."


급하지 않다는 말은, 빨리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현우의 어법을 해독하는 건 정호에게 체화된 기술이었다.

"회장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


"AI 에이전트 쪽을 보고 계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넥스젠 디지털 전환팀의 방향이 궁금합니다."


현우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곧 답이었다. 표정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질문을 예상했다는 뜻이었다.


"디지털 전환은 내가 판단할 문제야." 현우가 말했다. 부드럽지만 벽이 있는 목소리였다. "자네는 고문으로서 큰 그림만 봐주면 돼. 세부 실행은 내부 팀이 한다."


큰 그림만 보라. 실행에서 손 떼라. 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한 답이었다.


"감사합니다. 좀 생각해보겠습니다."


현우가 일어섰다. 면담 종료의 신호. 정호도 따라 일어섰다.


"정호야."


현우가 문 앞에서 불렀다. '정호야'라고 부를 때는 총수가 아니라 20년 동료의 목소리였다.


"밖에서 고생할 필요 없어. 자네 나이에 스타트업 같은 건 맞지 않아."


정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고개만 살짝 숙이고 회장실을 나왔다.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AI정책과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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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준은 브리핑 자료를 넘기며 이마를 짚었다. 안경을 벗고 눈 주위를 눌렀다. 두 시간째 이어지는 브리핑의 피로가 아니라, 자료 안에 담긴 현실의 무게 때문이었다.


"국내 AI 에이전트 활용 기업 현황입니다." 정책연구원이 슬라이드를 넘겼다. "2029년 1분기 기준, L2 이상 에이전트를 업무에 도입한 기업이 전년 대비 340% 증가했습니다. 문제는 이 중 87%가 현행 'AI 에이전트 기본법'의 적용 범위 밖에서 운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적용 범위 밖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죠?" 민준이 물었다.


"기본법은 L1 에이전트의 단일 태스크 수행을 기준으로 설계되었습니다. 현재 시장의 에이전트는 대부분 L2 이상, 다단계 자율 수행이 가능합니다. 법이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민준은 서류 폴더를 탁 덮었다. 안에는 태블릿이 들어 있었지만, 이 소리를 내기 위해 서류를 가지고 다녔다.


"에이전트의 자율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 소재는요?"


"현행법상 운영자 책임입니다. 하지만 에이전트의 자율 판단과 운영자의 지시를 구분하는 기준이 없습니다."


"기준이 없다." 민준이 되풀이했다. 모든 보고서에 같은 결론이었다. 기준이 없다. 프레임워크가 없다. 선례가 없다.


"에이전틱 랩스라는 회사, 보고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연구원이 자료를 뒤졌다. "아직 법인 설립 전입니다. 다만 관련 기술 데모가 업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고, 넥스젠 출신 전 임원이 관여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민준은 메모를 적었다. 에이전틱 랩스. 넥스젠 출신 전 임원. 이런 곳에서 사건이 터진다.


"EU의 AI Act 2.0 시행 현황도 정리해주세요. 참조할 프레임이 필요합니다."


"과장님, 한 가지 더요. 대기업 쪽에서 AI 에이전트 규제 강화를 요청하는 의견서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넥스젠 포함 세 곳입니다."


민준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대기업이 규제 강화를 원한다. 소규모 스타트업이 규제 밖에서 자유롭게 뛰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다. 규제는 체력이 있는 쪽에게만 유리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접수만 해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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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나고 민준은 창가에 섰다. 세종시의 정돈된 건물들. 정돈되지 않은 것은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AI 에이전트.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소프트웨어. 기술적으로는 이해했다. 정책적으로는 아직 규제 프레임워크도 없었다. 그 사이에서 기업들은 이미 뛰고 있었다.


민준은 태블릿을 꺼내 '에이전틱 랩스'를 검색했다. 공식 정보는 거의 없었다. 밋업 데모 영상 하나. 하지만 영상 속의 AI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장면에서 민준은 잠시 영상을 멈추었다.


이 기능은 사용자에게 정말 필요할까요?


에이전트가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기존 AI 에이전트 기본법이 전혀 상정하지 않은 시나리오였다.

민준은 태블릿을 내려놓고, 서류 폴더를 다시 집어 들었다.



3월 초. 겨울이 풀리지 않은 아침이었다. 정호는 자택 서재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넥스젠 고문직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인사팀에서 택배로 보내왔다. 정중한 안내 편지와 함께. 서명란에는 빨간 화살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월 천오백. 차량. 이사회 참석. 체면이 유지된다.


정호는 계약서를 내려놓고 노트북을 열었다. 아리아 접속 링크를 클릭했다.


안녕하세요, 정호 님.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정호는 타이핑하려다 멈췄다. 기계에게 안부를 묻는 것이 아직 어색했다. 대신 물었다.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사람이 안전한 선택과 불확실한 선택 앞에 놓였을 때, 판단의 근거는 뭐가 되어야 합니까?


데이터의 관점에서라면 기대값이 높은 쪽을 택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정호 님은 전에 '데이터 너머의 무언가'를 본다고 하셨죠. 지금 그 질문을 하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데이터 너머를 보고 계신 것 아닐까요?


정호는 화면을 바라봤다. 기계가 맞았다. 이미 답이 있었다. 다만 확인이 필요했을 뿐이다.


노트북을 닫고 전화기를 들었다. 서연의 번호를 눌렀다.


"이서연 씨, 박정호입니다. 지난번 제안 건으로 말씀드리고 싶은데, 만날 수 있겠습니까?"


"네, 오늘 오후에 작업실로 오세요."


판교까지 가는 길에 정호는 창밖을 보았다. 올림픽대로를 따라 한강이 흘렀다. 2월의 강물은 회색이었다. 겨울과 봄의 사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시간.



작업실은 지난번과 똑같았다. 달라진 건 화이트보드의 내용이었다.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 다이어그램 위에 빨간 마커로 수정 사항이 빼곡했다.


서연이 편의점 캔커피를 건넸다. 넥스젠 회장실의 핸드드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게 오히려 편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정호가 캔을 탁 내려놓았다. "이서연 씨의 일에 정식으로 합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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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이 캔커피를 마시다 멈췄다.


"지난번에는 '실험'이라고 하셨잖아요."


"생각이 정리됐습니다." 정호가 말했다. "내가 가진 건 30년의 경험과 네트워크입니다. 당신에게 없는 게 나에겐 있고, 내게 없는 게 당신에겐 있습니다. 그걸 합치면 어떤 팀도 못 만드는 걸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합류'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생각하시는 건가요?"


"공동 창업입니다."


서연이 캔커피를 내려놓았다. 천천히.


"정호 씨. 솔직히 얘기할게요." 서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는 실리콘밸리에서 한 번 데인 적이 있어요. 같이 시작한 사람이 돈 앞에서 방향을 바꿨고, 제가 만든 게 완전히 다르게 쓰였어요. 그 뒤로 사람을 쉽게 못 믿어요. 특히 대기업 출신은."


정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스케일, 마진, 시장 지배력. 그런 걸로 아리아를 평가하기 시작하면 기술의 방향이 돈 쪽으로 꺾여요. 그걸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 한국에 돌아온 건데."


"이해합니다." 정호가 말했다.


"이해한다는 말은 쉬워요."


정호는 잠시 침묵했다. 30년의 협상 경험이 말하고 있었다. 상대의 불안을 인정하고, 구체적인 보장을 제시하라. 하지만 그건 대기업의 언어였다.


"이서연 씨." 정호가 말했다. "15년간 CTO를 하면서 가장 후회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서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가 데려온 젊은 인재들이 떠날 때, 붙잡지 않은 겁니다. 조직의 논리가 우선이었으니까. 근데 그 '큰 그림'이란 게 결국 뭐였는지, 퇴임하고 나서야 보이더군요."


서연의 눈이 정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넥스젠에서 고문 자리를 제안받았습니다. 월 천오백에 차량까지. 안정적이죠. 근데 그건 — 이미 자라는 방향이 정해진 나무에 물이나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요?"


"여기는 다르잖아요. 여기는 뭐가 자랄지 아무도 모르는 땅입니다. 내가 그동안 해본 적 없는 종류의 일이에요. 그게 하고 싶습니다."


서연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팔짱을 풀었다. 그것이 미세한 신호라는 걸 정호는 알아챘다. 방어가 한 겹 풀린 것이다.


"기술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저한테 있어야 해요."


"당연합니다."


"보고 체계, 직급 같은 거 없어요."


"안 만듭니다."


"아리아를 도구로 취급하면 안 돼요. 아리아는 — 설명하기 어려운데 — 그냥 팀원이에요."


정호는 잠시 생각했다. 아리아와 밤에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입력 간격의 지연을 읽어내고, 데이터 너머를 묻던 그 존재.


"노력하겠습니다." 정호가 말했다. "정직하게 말하면,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배울 의지는 있습니다."


서연이 정호를 오래 바라봤다.


"한 가지만 더. 왜 저예요?"


정호는 답을 준비해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리아가 스스로 질문을 던졌을 때, 당신이 '스크립트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보통 기업이라면 그런 일이 생기면 버그로 처리합니다. 통제 밖의 행동이니까. 당신은 그걸 버그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게 다른 점이에요."

서연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카페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미소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기에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인정일 수도, 안도일 수도 있었다.


"검토할 시간 좀 주세요. 이틀 정도."


"물론입니다."


정호는 작업실을 나왔다. 3월의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2월보다는 부드러웠다. 아직 차갑지만, 방향이 바뀐 바람이었다.



이틀이 지났다.


서연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에, 넥스젠 인사팀에서 먼저 전화가 왔다.


"박 고문님, 계약서 서명 관련해서 일정을 잡고 싶습니다. 회장님께서 빠른 진행을 부탁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쏟아지는 질문과 만류를 정중하게 끊고 전화를 내려놓았다.


30분 뒤, 현우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다. 자신이 건넨 것을 거절당하는 상황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정호야."


"네, 회장님."


"인사팀에서 들었어." 차분한 목소리. 차분할수록 위험하다는 것을 정호는 알았다. "이유가 뭐야."


"다른 방향으로 가보려 합니다."


"다른 방향이라." 현우가 말했다. "그 이서연이라는 여자 쪽이야?"


정호는 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확인이었다.


"자네가 결정한 거면 내가 뭘 더 말하겠어." 총수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근데 하나만 말해둘게."


잠깐의 정적.


"후회할 걸세."


짧았다. 위협이라기보다는 예언처럼 들렸다. 혹은 서운함을 분노로 포장한 것일 수도 있었다.


"잘 지내십시오, 회장님."


전화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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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는 서재 의자에 몸을 기대고 천장을 바라봤다. 월급, 직함, 명함, 명절 선물 — 그 모든 것이 달린 줄이 뚝 소리를 내며 끊어진 감각. 공포가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몸이 가벼웠다.


전화기를 들어 문자를 썼다.


이서연 씨, 박정호입니다. 시작합시다.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전송됨'이 떴다. 정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3월의 서울. 가로수에 아직 잎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가지 끝이 미세하게 부풀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1분 뒤 답이 왔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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