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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Aug 11. 2022

엘리베이터 없는 집에 살고 싶어.

네 살 어린이의 말


윗집 사람도
지금 변기에 앉아있겠지?

아랫집 사람도?
그 아래,
아래,
아랫집도
마찬가지겠지?

-정성갑 <집을 쫒는 모험>





아이가 어느 날 말했다. “엄마. 나도 엘리베이터 없는 집에서 살고 싶어.”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빌라, 아파트, 주상복합, 오피스텔, 주택, 기타 등등 거주하는 집의 형태를 구분하는 다양한 명칭과 그 개념에 대한 이해조차 전혀 없을 때였다.


당연히 나고 자란 아파트를 ‘집’의 기본값으로 생각하겠거니 했던 것은 나의 오산이었나.

이 어린것(?)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파트가 가진 아쉬운 점을.


‘엘리베이터 없는 집’이라 함은 대문을 기점으로 보이는 모든 문에 기꺼이 진입할 수 있다는 뜻이자,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면 하수처리장까지 급행으로 간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어딘가를 거치거나 고여있거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는 통로다. 드나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타고 이동하는 시간, 가다가 층층이 멈추게 될 시간을 우리는 확실히 계산하지 못한다.


이 미지수의 시간 때문에 약속에 늦거나, 버스를 놓치거나, 정체 구간에 걸리는 종류의 불편함은 어른의 것. 아이에게는 그런 것쯤이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


그럼 왜일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추측컨대 아이는 드나듦의 자유를 방해받은 것 아닐까. 홀가분하게 무언가를 두고 오거나 집어 올 수 있는 자유로움. 안에서도 밖을, 밖에서도 안을 수시로 살펴볼 수 있는 시선의 자유로움 같은 것을.


아파트 안에서 날씨를 확인하고 채비하여 내려갔는데, 공동 현관에 당도하니 이미 날씨가 바뀌어버린 경험. 그때의 기분.


밖에서 놀다가 주운 나뭇가지나 꽃 돌멩이, 메고 있던 책가방 같은 것을 집 안에 후딱 들여다 놓고 싶은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서 엘리베이터나, 공동현관, 비밀번호 인증 같은 것들은 정말 번거롭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미의 욕구는 사람의 본능이니까. 어린이라서 더 자연스럽게 자유와 낭만을 탐하는 것이다.


정답은 알 수 없지만.


집의 형태에 대해서 그리고 삶의 방식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욕망은 자유니까. 이런저런 생각 안에서 부유하는 사람과, 소망을 상상으로,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어쩌면 이미 나는 엘리베이터처럼 거치거나 고여 있거나 기다리는, 일련의 결재 과정이 필요한 어른 인지도 모르지만.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으니, 일단 아이에게는 다음엔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으로 가자고 공수표를 날려두었다.


우리 ‘집’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스위스나 뉴질랜드 같이 너른 땅에 사는 사람들도 비슷한 고민을 할까? (안 살아봐서 모름.)

집으로, ‘집’으로 함몰되는 욕망은 우리만의 것일까?


엘리베이터는 차치하고 비와 함께 오물이 흘러 들어오는 곳에는 살고 싶지 않다. 내가 어디에서 살고 싶다 혹은 살고 싶지 않다고 자유롭게 떠들어 댈 수 없다면, 선택의 여지나 욕망의 자유가 없다면 우리의 존엄은 상실된다.


제물을 받아들이는 신의 위엄


존엄(尊嚴)은 본래 로마에서 귀족들이 누리는 특권이었다고 한다. 공화정에 속한 자의 권위에 따르는 명성과 실권을 디그니타스(dignitas)라고 했다고.


제물을 지고 가는 신의 표정이 오묘하게 느껴진다. 존엄에 대한 논쟁이 물살을 타고 사람이 사는 ‘집’의 깊은 곳까지 밀고 들어온다.


아이와 나, 우리 가족일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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