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줌마 관찰기>
요가원에 꾸준히 다닌 지 6개월째다.
이전에도 요가하러 다닌 적은 있지만 이렇게 끊임없이 다닌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헬스장 gx 수업으로, 그리고 단체 순환 운동(?) 한쪽 구탱이 수업으로, 핫 요가가 유행일 적에는 핫요가원도 다녔다. 코로나 이전에는 한 수업에 40명가량 모이는 요가원에도 다닌 적이 있는데 땀내 발내 각종 사람 냄새가 흠뻑 뒤엉킨 아수라장 같아서 딱히 마음을 두지 못했다. 게다가 조명은 왜 이리 어두침침한지. 남녀 합반 요가원은 어쩐지 민망해서 드문 드문 다니다 곧 그만두기 일쑤였다.
지금 다니는 곳은 한 수업에 들어오는 인원이 열명 내외로 딱 적당하다. 오전 수업에 오는 멤버도 거의 고정적이어서 대부분 아는 얼굴이다. (웃픈 건 마스크 벗으면 누구시더라..?)
신기한 것은 수업 전에 요가원 안에서 그 누구도 사담을 나누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이 요가원의 암묵적인 규칙인 듯했다.
나는 이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스몰토크에 무척 취약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날씨 이야기로 가볍게 시작해서 결혼 유무와 출생 연도 가정사로 무겁게 내달리는 이야기 속에서 안면 근육을 사회적으로 올바른 위치에 고정시켜 둘 자신이 없었다.
그런 패턴이 매일 반복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사회생활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내 삶에 조직 생활을 더 이상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나이로 결혼 유무로 혹은 경력이나 재력, 외모 따위로 군집하거나 계급이 나눠지는 것은 지긋지긋하다고 느꼈다.
운동을 하러 수영장에 갔던 시어머니로부터 동네 수영장의 그 특별한 분위기에 대해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수영 후엔 삼삼오오 떡을 나누어 먹고 (떡 당번을 정해 잔치가 아니어도 떡을 해와야 함.) 심지어는 사우나 안에서 김치전, 파전도 부쳐먹는 풍습에 관해서. (운동하면 할수록 살찌는 이유) 그리하여 자유 수영 레인이지만 초급자는 결코 자유롭게 수영할 수 없는 고질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들은 이후로 더더욱 생각이 확고해졌다.
사람들은 스몰토크를 왜 할까? 아마 조용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못 견디는 사람이 먼저 시작할 것이다. 서늘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서로를 탐색하고 좋은 인상을 풍기기 위해서 가볍고, 치명적이지 않은 주제의 스몰토크를 시도한다.
다행히도 요가원에서는 서로 고요할 권리를 존중한다. 고요할 권리. 이 얼마나 상서로운 분위기인지. 만나면 서로 인사하고, 때로 안부도 묻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다정히 주고받기도 하지만 거기까지다.
처음에는 침묵이 어색했던 나머지 엘리베이터에서 텐션을 높여 스몰토크를 던졌다가 결계에 튕겨 나오듯 보이지 않는 오라에 억지스러운 반응이 튕겨 나온 적이 있었다. 돌아와 가만 생각해보니 어색함은 나만의 것이었다. 혼자를 못 견딘 것도 나였다. 조금 더 적응한 뒤에 마주한 침묵은 마냥 어색한 것도 깨부수어야할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은, 온갖 책임과 할 일들을 주렁주렁 어깨에 매달고 있는 사람들이 작정하고 고요하고 싶을 때 시간을 내어 이곳에 온다.
몸과 호흡으로 빈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마음을 둔다. 고요하다. 고요함을 주시한다. 그리고는 그 에너지로 구겨진 얼굴을 펴고, 어깨도 펴고, 나가서 밥도 짓고 영차 영차 가족도 보살피고 세상도 구하는 것이다.
회사에서의 점심시간이 떠오른다. 아침을 못 먹고 와서 배가 너무 고픈데, 실컷 밥 먹고 싶은데, 밥이랑 함께 타인의 푸념이나 한담, 뒷담도 함께 씹어 삼켜야 했던 매일. 다 같이 먹어야 그럴싸 한 분위기가 갑갑해서 혼자 사무실에 남아 모니터 앞 삼각 김밥으로 때우는 것이 속편했던 모순의 날들.
회사뿐이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스몰토크를 해야 할 곳들이 지나치게 많다. 집에서 이웃끼리 시댁에서 학교에서 친구와 기타 등등 사회적으로 무난한 사람처럼 살기 위해 유지해야 하는 관계와 역할들.
당분간 이 요가원에 꾸준히 다닐 것이다. 여기서는 거리낌 없이 고립될 수 있어서 좋다. 혼자를 기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것이 꽤 자연스럽고 행복하다.
얼굴 근육뿐 아니라 내장까지 편안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