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줌마 관찰기>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준이 <서울대 졸업 축사/2022>
석사를 수료한 지 햇수로 오 년. 학교 행정실에서 오래간만에 문자가 왔다.
“올해를 넘기면 영구 수료됩니다.”
머리 털나고 첨으로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생돈 들이고 무리해서 진행하다가 결국은 육아 휴직에 퇴사로 이어진 대학원 과정이었는데,
졸업하지 못하고 영구 수료되면 아쉬워 마음이 켕겨도 마음 한쪽에 밀어 두고 살 것이 뻔하다.
일을 벌여 시작은 해놓고 끝까지 잘 마무리하지 못하는 나의 습성을 또다시 반복하기 싫었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끊어보고 싶었다.
그래 엉망이어도 좋으니 마무리만 지어보자.
들어갈 때 들인 돈이나 일을 더 잘하고 싶다는 큰 결심에 비하면 그야말로 볼품없는 졸업장이다. 경제학적 관점으로 보면 가방끈 째금 길어진 걸로 벌어들인 부수입이 없었으므로 투자라고 볼 수 없고 사치에 가까운 졸업장이지만 그래도 마무리만 지어보자.
졸업을 위해 부족한 학점은 추가로 듣기로 했다. 신청기간에 맞추어 서류를 보내고 행정 절차를 밟고,
개강을 했다.
코로나 기간 동안 비대면으로 수업하면서 얼어있던 학교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있었다.
캠퍼스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들썩이는 분위기, 밤공기, 여학생들의 웃음소리, 축제를 위해 설치한 간이 천막, 크롭티, 현수막과 벽보들, 맑은 민낯과 커다란 백팩, 이런 것들이 뒤섞인 늦은 오후의 공기가 아름다워서 단박에 복학하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강의실에 들어가니, 동기들은 온데 없고 내가 바로 출석부 1번 고인물 of 고인물이다. 배우기 좋은 때를 훌쩍 지나 무리해서 강의실에 들어와 앉아 있는 나.
아이 하원 시키고 친정에 맡기고 전철을 굽이 굽이 타고 가장 멀리서 왔지만 이렇게 돌고 돌아서라도 마무리할 수 있다면. 적어도 할머니가 되어 후회하는 일은 없겠지. (아이고야 그때 그럴걸.. 옘병)
강의를 듣고 나오니 어깨죽지가 굳어져 아팠다. 긴장 탓이다. 진은 다 빠지고 연거푸 들이킨 카페인으로 정신만 각성된 상태로 또다시 지하철을 타고 굽이 굽이돌아 집으로 간다.
허기 진 배를 외면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역을 지나 신호등을 건너 집에 도착해 아이 방 문을 열어보니 밤 열한 시 반. 이미 콜콜 잠든 딸.
이렇게 엉성한 하루하루를 얼기설기 엮어서 내일의 나를 만나러 간다.
부디 이게 다 무슨 의미냐고 타박하지 않기를, 앞서 버린 동기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한숨짓지 않기를, 아줌마라는 이유로 혐오하지 않기를, 2000년대생 후배와 나를 비교하지 않기를, 고인물의 알량한 짬바를 내세우며 으스대지 않기를, 집으로 돌아와 지친 밤에 안개처럼 허무해하지 않기를.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친절하기를.
그리하여 그 끝의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