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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 균, 술(확장본)

한때 꺼렸던 카레의 가치를 재발견하기까지

by 이건해

어릴 때부터 카레를 상당히 자주 먹다가, 1년쯤은 손도 대지 않게 된 시기가 있다. 카레를 먹고 탈이 나서 구토와 설사에 시달린 탓인데, 돌이켜보면 카레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때 밥을 먹기 전에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하고 돌아온 주제에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은 탓이었다. 애꿎은 카레 탓을 할 일이 아니었지만 정말 어릴 때였으니 기분과 원인을 착각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로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급식을 먹는 환경에 놓인 이후로는 카레를 적당히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 ‘야호, 카레다!’ 하고 환호작약할 정도는 아니고 대충 만족할 정도였다는 말이다. 카레의 맛이란 아주 특별하지도 않고 나쁠 것도 없이 안정적인 수준이니까 카레에 대한 선호도 딱 그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카레가 얼마나 소중하고 맛있는 음식인지 절실히 깨닫는 계기를 맞게 되었으니, 다름아닌 훈련소 때문이었다. 대체로 음식 수준이 평균 이하에서 오르내리는 논산훈련소에서 ‘카레’는 최고의 특식 취급을 받았다. 카레만큼은 훈련소에서 만드는 게 아니라 완제품을 사다 데워줬기 때문이다. 카레의 따끈하고 은근슬쩍 매콤한 맛과 살짝 뭉근해진 감자, 당근, 고기의 질감은 그저그런 밥을 기적의 보양식처럼 만들어줬다. 찌는 더위 속에서 비에 젖은 판초우의를 입고 훈련받은 날 카레를 먹게 된 순간의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지경이다. 질병의 근원 취급받던 카레가 행복과 건강의 원천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후로는 주로 대학교 친구들과 놀러가서 카레를 해먹게 되었다. 고기 구워먹는 게 즐겁긴 하지만 비용도 비싸고 뒷처리도 지겨운 탓에 합의하에 노선을 변경한 것인데, 카레란 빵에도 밥에도 잘 어울리는 데다 씹고 맛보는 재미가 충분할 만큼의 재료가 들어가 모두가 만족하게 되었다. 아마 이 정도로 호불호를 가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맛있는 음식도 드물 것이다.

다만 이 얘기는 어린 시절부터 익숙해서 카레의 근본으로 여겨지는 오뚜기 3분 카레, 혹은 그와 유사한 카레에 국한된다. 수많은 카레 중 정확히 내 입맛에 맞는 것은 노란색 오뚜기 3분 카레라는 걸 친구들 따라 이 카레 저 카레 먹어보면서 깨닫게 되었다. 다른 게 맛이 없다는 건 아니다. 유명하다는 정통 인도 카레 음식점에 가서 먹은 카레와 난은 대단히 맛있었다. 카레는 매콤하고 혀에 착 감겼으며, 쫄깃하고 담백하면서도 감칠맛이 나는 듯한 난과 잘 어우러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카레 먹은 맛이 나지 않았다. 국물 요리 같은 모양의 홋카이도식 카레도 제법 얼큰하고 구운 브로콜리 먹는 맛이 아주 각별했으나 카레가 아니라 얼큰한 맛을 낸 스튜를 먹은 기분이었다. 요컨대 감자나 당근, 고기가 뭉텅뭉텅 크게 썰려 들어가 있지 않으면 카레 먹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엄밀히 따져본다면야 카레의 본질은 건더기에 있지 않겠지만, 어릴 때부터 새겨진 인식이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러고보니 일본식 카레로 유명한 프랜차이즈인 아비꼬도 제법 많이 먹었다. 홍대에서 놀다 영 갈 곳이 마땅치 않으면 누군가는 아비꼬를 가자는 안을 냈는데, 더 나은 대안이 나오지 않아 그대로 받아들여진 적이 제법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먹은 아비꼬의 카레는 인도 카레보다는 한국 카레에 가까워 좋았다. 게다가 여러가지 옵션으로 토핑을 마음껏 추가할 수 있다는 점도, 맵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었다. 특히 토핑 중에 구운 마늘 슬라이스가 어디서 보기도 힘들고 맛도 좋아서 즐겨 먹었는데……사실 그것을 빼면 나는 대체로 기본에 가까운 카레만 먹었다. 더 맛있는 메뉴도 있고 토핑을 더할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추가로 돈을 들여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되는 만족도보다 돈을 쓰지 않을 때의 만족도가 컸던 것이다. 게다가 추가요금으로 토핑을 얹는 시스템은 카레를 완제품으로만 접해온 나로서는 밑반찬을 하나 추가할 때마다 돈을 더 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영 내키지 않았다. 결국 어린 시절부터 새겨진 입맛에 맞는 ‘기억 속의 오리지널’ 카레를 이길 카레가 없었다는 얘기다. 인도의 알루 카레가 오뚜기 카레와 가장 비슷하다는데, 이것은 또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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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일본어번역가. 황금가지 공모전 우수상 수상. 브런치 출판프로젝트 특별상 수상. 2024년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공모전 단편 우수상 수상. 협업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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