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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의 고고한 야경

-아차산의 밤산책이 이렇게 멋질줄이야

by 이건해



2024년의 연말은 상당히 처참했다. 손에 든 원고를 모두 들고 브런치북 공모전에 다시 도전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남은 거라곤 과제처럼 남아있는 원고와 무서우리만치 어려운 번역 의뢰뿐이었다. 어쨌거나 출간될 원고와 일감이 수중에 있긴 했으나 희망찬 내일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연말 모임에 다녀왔고, 틈틈이 시위를 하러 나갔다. 신년이라는 고문을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 주변 사람 모두가 고통과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며 공분을 터뜨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1월 중순쯤 되자 산이 그리워졌다. 수성동을 거쳐 인왕산에 가보기도 했지만 시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답답함이 누적되고 있었다. 나는 결국 12일에 수면 장애로 컨디션이 엉망진창인데도 작업을 했고 낡아빠진 네파 등산화에 방수 처리를 다시 한 뒤에 집을 나섰다. 이렇게 몸이 엉망일 땐 둘레길에 가는 게 안성맞춤일 거라 생각하면서.


출발이 3시였으므로 아차산에 도착한 건 4시 30분, 산에 올라가기 늦은 정도가 아니라 하산을 마쳐도 이상하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러나 아차산은 이미 가 본 적이 있는데다 서울 둘레길에 포함될 정도로 낮고 걷기 좋은 산이다. 나는 후딱 산을 넘기로 하고 사가정역에서 사가정 공원을 거쳐 계곡을 따라 망우산에서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향했다.


그런데 이 길, 상상 이상으로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데크길이 넓게 좌로도 우로도 어지러울 정도로 뻗어있어 일종의 수상도시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보기에도 멋지고 접근성이 높아졌다는 것도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이래서야 걷는 맛이 없다. 나는 일부러 데크 옆의 경사로를 따라 걸어올라갔다. 낙엽이 진데다 석양빛을 받아 불그스름한 길은 올라갈수록 눈이 녹지 않아서 희게 변했다. 나는 등산화를 신은 상황에 한해 눈을 아주 반기는 이상한 특질이 생긴 터라 데크길 바깥쪽에 길 비슷한 것만 보이면 나가서 눈을 밟고 경사를 올랐다. 뽀드득하며 눌리고 밀리면서도 결국엔 발을 받쳐주는 감각은 늘 다채롭게 즐겁다.


기대하지 않은 겨울 산의 맛을 즐기고 능선에 도착해 스탬프를 찍었다. 그런데 어째 그동안 도장을 찍어온 스탬프지와 이름이 달라서 알아보니, 서울둘레길 구간을 더 세분화해서 개편했단다. 한 코스를 오래 걷는 부담이 줄어든 것은 반갑지만 지금까지 모은 스탬프가 허사가 될 것 같아 아쉽다.


스탬프 바로 옆은 당장 깔딱고개로, 데크 계단이 길게 이어졌다. 천천히 오르자니 가벼운 옷차림으로 혼자 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여타 산과 달리 여자들이 더 많았다. 아주 큰맘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접근성이 좋은 덕분이리라.

(눈덮인 아차산의 능선과 계단길)


그나저나 높지도 않은 산중턱인데 이미 전망이 좋았다. 전망대에서 북한산을 비롯한 산자락이 실루엣처럼 늘어섰고 그 아래쪽을 도시 풍경이 가득히 채웠다. 눈덮인 산자락 뒤로 뻗은 한강도 퍽 가까워 시원스러웠다. 이만하면 이미 가성비 초과 달성이다.


해가 지기 시작해서 제법 쌀쌀했다. 기온은 0도 언저리로 공기에 약간 날이 섰다. 계단 중간에 멈춰서 보온병의 차를 아주 약간 마셨는데, 갈증보다는 온기 충전 효과가 크게 느껴졌다. 여름에 산속에서 아이스크림으로 무더위를 쫓듯, 겨울에 산속에서 차로 추위를 쫓는 것도 퍽 즐겁고 멋진데다, 심지어 운치있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570계단이라는 깔딱고개의 계단은 길었다. 완만한 계단이고 날씨가 추워서 체력적인 부담은 심하지 않았지만 별로 꺾이지 않고 줄곧 계단이 이어져 심리적으로 더 길게 느껴졌다. 17분 내내 계단만 올랐다. 그래도 질리지 않았는데, 그건 경치가 좋았기 때문이다. 아마 초보가 많이 가는 관악산 신공학관 루트가 경치까지 이렇게 좋았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이 완벽한 루트가 되었을 것이다. 누구나 가는 족족 등산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르기 쉽고 볼 것도 많은 이곳 아차산을 최고의 등산로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정상처럼 솟은 봉우리인 동시에 넓게 다져진 용마산 5보루에 올라선 나는 그렇지도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생에 비해 주어지는 볼거리의 가성비도 압도적이고 서울 근교 산의 샘플러처럼 다채롭기까지 하지만, 고난이 너무 약하고 단조롭다. 스포츠도 게임도 자기 능력을 잘 활용해서 온힘의 7할이나 8할을 투자한 게 극복이나 향상이라는 보상으로 돌아올 때 사람을 빠져들게 만든다. 그렇게 볼때 아차산은 아주 매력적인 튜토리얼 정도가 아닌가 싶었다.


아무튼 눈덮인 보루에 오르니 석양이 한층 짙어졌고, 산 아래 가득 펼쳐진 도시에는 어둠이 내려 그 사이로 무수한 차량이 만드는 빛의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까우면서도 넓게 펼쳐진 도시 풍경은 처음인 듯했다. 빛의 알갱이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핏줄을 타고 흐르는 헤모글로빈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차산이 사람을 등산에 사로잡히게 만들 수는 없을지라도, 애써 올라온 보람을 느끼게 하기엔 충분하다 싶었다.


(석양 아래 빛이 흐르는 도시 풍경)


그나저나 넓은 터 한쪽에 더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뒀는데, 거기에 온갖 산악회가 길 안내용 리본을 묶어놓아 서낭당 보다 화려한 모습이었다. 산악회처럼 대대적으로 산에 다니는 집단은더 높은 명산만 다니는줄 알았는데, 이렇게 소박하고 여유로운 산도 다니며 표식을 남기는 모양이다. 산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니는게 제일이지만, 이렇게 관리가 쉬운 인공물에 모아서 남기는 건 괜찮은것 같기도 했다. 지자체에서 대놓고 허락하기도 힘들고 막기도 뭣한 회색지대의 기념 행위겠지만…….


(그야말로 산악회의 전당이다)


아차산 정상부의 능선은 공원처럼 잘 닦인데다가 경사도 별로 없어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편하고 즐거웠다. 약간 과장하면 매일이라도 다니고 싶은 길이다. 이렇게 소박하게 능선길을 맛볼 수 있는 길이 흔치 않다. 게다가 해가 순식간에 져버리고 한강 다리와 그 주변에 화려한 조명이 들어와 흡사 유원지라도 바라보는 듯했다. 한강 야경 감상하는 재미가 이렇게 각별한 줄은 나도 몰랐다.


산속은 빨리 어두워진다는 걸 이미 질리도록 경험했지만, 아차산도 산은 산이라 잠깐 멈췄다 돌아서면 아까보다 더 어두워지길 반복해서 슬슬 라이트를 모자에 끼우고 걸어야 했다. 그나마 보름달이 오싹하도록 밝아서 조명이 비추지 못하는 곳도 그럭저럭 눈에 잘 보였다는 게 다행이었다. 인공의 빛이 가득한 도시에선 좀처럼 느낄 일이 없으나, 보름달은 정말로 밝다. 좀 무리하면 책도 읽을 수 있을 정도다. 먼 옛날에도 달밤에는 그럭저럭 야외 활동이 가능했겠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이걸 처음으로 깊이 실감한 건 야간행군 때였는데, 그때는 내가 보름달 아래 걷기를 스스로 나서서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슬슬 정상이 나와주지 않으려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차산이 넓어서 눈 쌓인 데크 계단을 걸어내려갔다가 다시 산 위로 올라가야 했다. 이만하면 하염없이 산을 걷고 싶은 욕구를 다스리기에 충분하다. 그즈음해서 데크 계단 옆으로 사다리꼴을 한 성벽이 보였다. 고구려 시대의 방어용 요새인 아차산 4보루로, 분명 예전에 아차산에 왔을 때 봤을 텐데도 대단히 생경하게 느껴졌다. 밤중에 산꼭대기에서 보름달 아래 빛나는 성벽을 보고 있는 것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1500년도 넘은 유적을 이렇게 달밤에, 심지어 산꼭대기에서 볼 기회가 인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나는 영화에 과장되어 묘사된 고고학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밤중에 고대 문명의 흔적을 발견하면 얼마나 감격스러운 동시에 압도되는 기분일까. 나는 보름달 빛에만 빛나는 비밀 메시지 같은 게 없을까 상상하며 걸음을 옮겼다.


(보름달 밑의 성벽은 고대유적 느낌이 가득하다)


그런데 보루로 올라서려는 차에 뒤쪽에서 남자가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통 캄캄한 시각에 대체 어느 할일 없는 작자가 산꼭대기를 돌아다닌단 말인가? 섬짓한 느낌에 돌아보니, 근처의 벤치에서 중년 남자 한 명이 배낭을 내려놓고 통화중이었다.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직 초저녁에 불과하니 누가 있어도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 나 역시 해 진 뒤에 산꼭대기를 돌아다니는 할일없는 작자였다. 하여간 산속의 어둠보다 두려운 것은 그 뒤에 숨은 미지의 존재다.


보루에 올라서서 완전히 공원처럼 잘 다져진 길을 지나 언덕을 또 한차례 올랐다. 그즈음엔 등뒤에서 아주 빠른 걸음으로 누가 다가와서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아예 속도를 늦추고 보니 아니나다를까 아까 그 아저씨였다. 아무리 보름달이 밝아도 어두운 산속에선 아무 조명이나 좀 켜고 다녔으면 하는 바람이다. 밝은 등산복이 타인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듯, 조명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기 밤눈이 밝다고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야간 주행을 하면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눈에 익은 평지를 걸어 6시 20분에는 아차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이때는 달빛과 도시 야경의 불빛을 제외하면 조명이랄 게 없는 상황이라 모자에 끼우고 있던 라이트를 손에 들고 셀카를 찍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찍은 사진을 보면 시커먼 넥게이터를 쓰고 진한 남색 재킷을 입은데다 배낭의 가방끈에는 파우치들까지 달려 수상하기 짝이 없는 꼬락서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밤에 마주치기 싫을 지경이니, 앞으로는 좀더 화사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다녀야겠구나 싶다. 복장 역시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셈이다.


아차산이 낮다곤 해도 해가 진 영하권의 산 정상에서 간식을 먹으며 놀 것도 아니라, 차만 한 잔 마시고 패딩을 꺼내 입은 뒤 하산을 시작했다. 여기부터는 예전에 친구들과 왔던 길이라 내려가는 마음이 편했다. 지금까지보다 조망이 더 트여있어 한강을 넓게 볼 수 있었다. 감동적인 야경이었다. 눈앞에선 밤하늘을 담은 한강이 굽이쳐 흘렀고, 그 앞뒤로는 별빛같은 도시의 빛이 뿌려놓은 듯 가득 빛나는데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은하수를 따라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곳이었다. 1500년은 된 성벽 옆에서 발달한 문명이 모사하듯 이룬 우주적 풍경을 조망하다니 이만한 명소가 얼마나 있을까 싶다. 나는 친구들과 올 때도 야경을 노리고 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겼으나, 하늘이 두쪽나도 못 가겠다고 할 만큼 높은 산이 아니니 또 기회가 생기리라 믿는다. 믿지 않으면 오지도 못할테니 일단 믿을 수밖에.


(한강의 야경을 이렇게 넓게 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정상에서 보루를 또 지나 약간 내려가자 여기부터는 조명이 있어 마음이 놓였다. 물론 헤드라이트에 의지해서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는 맛도 제법 훌륭하지만, 여기부터는 제법 길고 장대한 암릉지대가 이어지니 안전한 쪽이 낫다. 나는 발끝에서 전해오는 바위의 감각에 만족하며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런데 하산로의 암릉을 약간 지난 뒤쯤 한 커플이 스마트폰 조명에 의지해서 산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등산을 즐기러 온 차림은 아니었으니 야경 얘기를 어디서 접하고 오지 않았나 싶었다. 풍경이야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만큼 길만 조심하면 멋진 추억이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지나쳐 가던 그들이 멈춰서 나를 ‘사장님’ 하고 불렀다. 돌아보니 이 위에 조명이 없는지, 가파르고 험한지 묻기에 위로는 점점 완만해지니 스마트폰 조명만으로 갈 만할 거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나저나 행인에게 ‘사장님’이라 불린 건 처음이다. 하기야 야밤에 산속을 다니는데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고 조명 때문에 눈도 잘 보이지 않는, 영화 ‘더 씽’의 포스터 같은 꼴이었을 테니 달리 부를 말도 없었을 것이다.


7시 17분에는 고구려정에 도착했다. 어쩐지 정자 앞 돌바닥에 앉아 잡담을 나누는 외국인 커플 옆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숨을 돌렸다. 예전에 친구들과 와서 감탄했던 곳을 이제는 혼자 산책삼아 와서 오밤중에 셀카를 찍고 행인에게 사장님 소리를 듣다니, 시간의 흐름과 취향의 변화가 새삼 신비하고 무상했다. 하여간 변하지 않는 건 산과 강과 바위와 바위로 만든 성벽 정도다. 나도 내 취향도 변하며, 변하는 것을 나 자신조차 예견하지 못하는 법이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수 없다고 할까. 그러니 내가 지금 발을 담근 강물의 시원함을 즐기는 것밖에 더 확고히 행복해질 길은 없을 것이다.


고구려정에서부터 하산하는 길은 데크길과 암릉길이 있으므로 나는 암릉길을 택해서 내려왔다. 이만큼이나 광대하면서도 가파르지 않은 암릉은 어지간한 명산의 등산로에서도 접하기 어려우니 있을 때 걸어야 한다. 암릉을 다 내려오니 등산이라고 할 만한 길은 다 끝나서, 나는 짐을 다시 정리하고 데크 길을 걸었다. 역시 이쪽 길도 놀랄 정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진남색의 어둠 속으로 뻗은 데크길은 난간쪽에 설치된 조명으로 은은히 빛났고, 나무 사이로 난 길 위에는 청사초롱이 줄줄이 매달려 흔들렸다. 동양풍의 판타지 드라마 속을 걷는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하산 후에 시시하고 지치고 피곤한 길을 억지로 걸을 때가 대단히 많은데, 그에 비하면 꽃길이나 다름없었다. 아차산이 좋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만하면 짤막한 야등코스로 더할 나위가 없다. 나오길 잘했고, 걸어보길 잘했다.


(한국풍 환상의 길을 걷는 듯)


산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뒤로는 근처의 조그만 순대국밥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동안 직원 아줌마들은 한쪽에서 맥주를 마셨다. 시아버지가 잘해줘도 모시긴 힘들다는둥 잡담을 듣자니 삼포 가는 길 같은 근대 소설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나는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손님이 별로 없어 맥주를 마시며 쉬는 식당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야밤에 차를 마시고 산을 건너와 국밥과 막걸리를 먹으며 안식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는 당연한 사실을 되새기며 일상의 풍경으로 돌아갔다.




추신: 서울 등산로 추천 정리 페이지를 작성해서 조금씩 업데이트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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