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하기 싫을 극한 체험의 진미
1월 내내 눈이 빠지게 번역을 하고 공모전 수상작을 수정했다. 보람있는 일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그 무렵 네파에서 선물을 받은 게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네파 등산화를 오래 신어서…… 같은 이유는 아니고, 네파에서 반기별로 모집하는 네파크루로 미션 여럿을 수행하고 추첨을 거쳐 선물을 받은 것이다. 선물은 티셔츠와 배낭으로, 디자인이 말끔하고 유용해보였다. 덤으로 조그마한 감사장도 한 장 들어있었다. 나는 산을 타고 사진이나 찍은 여가 활동으로 감사를 받았다는 사실에 상당히 감격했다. 물론 회사에선 아무 감정 없이 정해진 홍보 활동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부지런히 산을 탄 결과로 감사도 받고 배낭과 티셔츠도 받은 것이다.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은 아니었다는 걸 형체로 남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물건이 너무 많아졌다 싶어서 등산을 본격적으로 하며 뭣모르고 샀던 잠발란 울트라라이트를 팔아버렸다. 발볼이 안 맞는 그 등산화를 잘 신어보겠다고 온갖 궁리를 하고 닦고 매듭법을 연구했는데, 순식간에 팔아치우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상황에 맞춰 신을 등산화가 많으면 물론 좋겠지만, 그래도 사람은 적정한 수준의 물건들을 갖고 그것들을 잘 써먹으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면서 지친 나는 또다시 산 대신 둘레길을 찾았다. 이번에는 서울 둘레길을 언젠가 완주하기로 작정하고 1코스인 수락산 코스를 걸었는데, 명산의 언저리라 그런지 기대보다 즐거웠다. 특히 후반부에는 채석장 흔적과 암릉도 구경하고 열차가 달리는 도시 풍경도 조망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모든 길의 어딘가에는 빛나는 부분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 다음주에는 수락산을 다시 오르기로 했다. 서울 근교에서 찾을 수 있는 최고의 암릉 코스인 기차바위(홈통바위)를 아직도 가지 못한 걸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테러로 보수중이던 코스가 드디어 개방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심신 모두 지쳐서 너덜대도 내 입맛에 딱 맞는 꿈의 등산코스를 드디어 갈 수 있다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는 곧장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1시 반쯤 이미 익숙한 장암역에서 내려 수로 옆을 따라 걸었다. 수로에 물은 거의 흐르지 않았고 눈이 쌓여 푸르게 빛났다. 수락산은 밤송이처럼 갈색이었지만 지면에 눈이 쌓인 게 조금씩 보였다. 오늘도 눈을 밟을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눈을 밟고 걷는 건 위험한데도 즐거운 이유가 뭘까? 부드러운 질감과 뽀드득대는 소리 때문일까?
아무튼 위험에 대한 대비는 이미 되어 있으므로 즐거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눈이 녹은 도로 한켠에 전혀 생각지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패딩을 입은 노년 남자 두 명이 이젤을 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붓과 물감으로 눈 내린 수락산과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그리는 모습이 얼핏 봐도 상당한 실력인 듯했는데, 내게는 그들이 그린 그림보다 그들이 그림을 그리는 풍경 자체가 더 아름답게 보였다. 밥 로스의 방송을 보고 자란 내가 가진 그림에 대한 로망을 그대로 구현한 듯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걸어다니며 사진 찍기도 바쁜 내가 언젠가 평온한 곳에서 느긋하게 붓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실제로 필요한 것은 여유나 실력보다는 과감히 나서볼 용기일 것이다.
(거리에서 산을 그리는 사람들)
수락산을 처음 갈 때 지났던 석림사 코스는 길을 따라 올라갈수록 쌓인 눈이 많아져,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대부분이 처음보는 길처럼 느껴졌다. 눈 때문에 걷기도 전보다 훨씬 힘들었고 반사광에 눈이 부시기도 했다. 나는 클립형 선글라스를 꺼내어 끼고 천천히 걸었다. 아이젠이 있었지만 그걸 끼고 걷기 시작하면 걸음이 상당히 무겁고 덜컥댄다는 걸 알기에 착용하지 않았다. 물론 남들에게 권장할 짓은 아니다. 그러나 이날 신은 네파의 쉐도우프로는 밑창에 빙판 대책이 되어 있으니 그럭저럭 믿을 만했다. 네파가 이 라인을 시리즈를 유지해줬으면 좋았으련만 아쉬운 일이다.
설경을 즐기며 적당무난한 계곡길을 오르자 2시 17분쯤에 갈림길에 도착했다. 오른쪽이 주봉 방면, 왼쪽이 홈통바위(기차바위) 방면이다. 2023년에 왔을 때는 주봉쪽으로 오르고 홈통바위쪽으로 내려왔다. 그때도 홈통바위를 타겠다고 와놓고 애초에 첫번째 갈림길부터 잘못 들어선 것이니, 무턱대고 다니는 것도 정도가 있지 싶다.
(험악해 보이지만 옆길이 있다)
처음 걷는 홈통바위행 등산로는 전형적인 계곡길로, 크고 작은 바위가 뒤섞여 깔려 있었다. 그러나 걷기에 괴로울 지경은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즐기며 걸을 수 있었다. 힘들어진 것은 계곡을 벗어나 능선으로 접근하면서부터였다. 흙길 위로 쌓인 눈이 애매하게 녹은 부분이 많아 질척거리고 종종 미끄러웠다. 눈길은 즐겁지만 진창은 괴롭다. 정말이지 걷기 싫은 길이다. 이런 길은 걸을 때도 미끄러워 힘들지만 걸은 뒤에도 신발부터 바지 밑단까지 엉망이 된다. 스패츠가 눈길보다 진창에서 더 빛을 발하지 않을까 싶었다.
드러운 길로 고도를 높여 3시 21분에는 능선에 올라설 수 있었다. 아주 치솟은 능선은 아니고 높은 능선으로 이어지는 맥 같은 곳이라 아차산 생각이 났다. 망우산에서 이어지는 아차산 초입이 딱 이런 분위기였다. 그러나 분위기만 비슷할뿐 이곳은 계단도 깔려있지 않고 비좁고 눈까지 덮여 있어서 긴장을 풀지 않고 걸어야 했다. 녹지 않은 눈의 양이 점점 많아져 발이 푹푹 빠지는 구간도 있었다. 나는 경사로에서 두 번쯤 발이 쭉쭉 밀려나는 경험을 했는데, 그럼에도 아이젠을 끼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런 오기를 부리게 되는 걸까? 등산을 해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지간하면 걸어나가는 행위를 중단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배낭이 몸을 단단히 감고 있어서 벗고 매는 게 어려운 탓도 있으나 크로스백을 맨다고 장비 전환을 바로바로 할 것 같지 않다. 내가 원하는 속도로 움직임을 지속하려는 욕구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게 아닐까? 아무튼 이런 관성 때문에 사고가 나곤 하는 것이니 반성할 지점이다.
데크 계단이 나와서 위로 올라서니 이제 주변 도시 경관이 내려다보이는 명백한 고지대였다. 눈도 등산객들이 밟았음에도 녹지 않았다. 고도에 따른 온도 변화를 이렇게 체감할 수 있는 경우도 많지 않다. 눈에 반사되는 햇빛이 슬슬 노르스름한 빛을 띠었으므로 서둘렀다.
(하얀 능선을 오르는 동안 서울 바깥을 조망한다)
능선을 따라 조금 걸으니 3시 44분에 경고메시지가 적힌 플랭카드가 나타났다. 추락사고 위험이라는 문구가 이렇게까지 크게 적혀 있는 곳은 처음이다. 로프 절단 테러 사건 이후 지자체에서 이곳을 폐쇄하려고도 했다는데, 그 마음이 엿보이는 듯했다. 하기야 방문객들이 상권을 크게 발전시키거나 입장료를 크게 내는 것도 아니니 사고가 터질 위험만 상존하는 코스를 놔두고 싶을리가 없다. 그러나 스릴에 중독된 암릉 애호가들이 있던 코스를 막는다고 안 갈리가 없으니 복구한 것이리라.
아무튼 결국 홈통바위에 도착했다. 중년 남자 한 분이 지나가긴 했지만, 눈 쌓인 급경사를 굳이 타고 싶어하는 사람은 더 보이지 않아서 나는 쾌적하게 경사를 올라갔다. 곧장 눈 쌓인 암릉 언덕에서 밧줄이 내려온 게 보였다. 망설일 것 없이 그걸 붙잡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대여섯 걸음도 오르기 전에 발이 미끄러져 배를 깔고 흘러내렸다. 밧줄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좋지 않은 꼴을 당했을 것이다. 나는 이 이상 머저리같은 오기를 부리며 아이젠 없이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냉큼 배낭을 풀어 아이젠을 끼웠다. 이제 남은 건 팔로 잘 버티며 올라가는 것뿐이다.
홈통바위는 크게 두 구간으로 나뉘어 있어서 일단 굴곡 하나를 넘어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앞을 보니 입안이 말랐다. 남은 구간은 체감상 45도 정도 기울기에서 시작해서 점점 가팔라져 끝은 70도쯤 되어 보이는 암벽이다. 심지어 눈이 쌓여 있었다. 밧줄이 바람에 흔들려 눈 위에 물결 무늬를 새겨놓고 있었다. 당연히 밧줄도 눈이 묻어 차가웠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어쨌거나 밧줄에 몸을 감아놓기만 하면 힘이 빠져도 사고가 나진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홈통바위의 하부 구간. 누가 처음으로 여길 걸어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길게 쉬어 몸이 너무 식으면 그것도 문제다. 나는 곧장 다음 밧줄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철컥철컥 아이젠이 긁히는 소리와 감각이 전해졌다. 과히 즐거운 느낌은 아니었다. 스파이크가 미끄러지는 걸 막아주긴 하지만 발을 옮길 때 땅을 잘 밀어주는 느낌이 들지는 않아서 발은 땅을 고정하는 역할을 하고 올라가는 힘의 절반 이상은 팔이 낸 듯했다. 덕분에 금방 팔이 불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반면에 장갑은 젖어서 차가웠다. 방수가 되는 장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배낭을 뒤적일 수도 없다. 정말 여기서 힘이 빠지면 오도가도 못하겠구나 싶었다. 나는 세 번쯤 숨을 돌려가며 4분 24초에 걸쳐 사면을 올랐다. 밧줄을 당기며 발을 옮기고 팔이 탈 것 같으면 멈춘다. 이를 반복했다. 삶을 나아가게 하는 게 대부분 단순반복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듯이.
(홈통바위의 상부구간. 과도하게 가팔라보이는 것은 착시가 아니다)
Y계곡도 대단히 험한 절벽 코스지만 힘들기가 이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힘을 빼고 설 굴곡도 없고 가장 강한 근육인 허벅지도 활용이 힘들었다. 그리고 속도를 높이면 팔이 아프고, 시간을 죽이면 손이 시린데다 중간에 그만두고 내려가는 건 더 어려울 게 뻔했으니, 비유하자면 준비가 덜 된 자가 자초한 고난으로 몰아간 인생의 축소판 같은 사면이었다. 그러나 고난이란 자초했을 때 즐길 수 있는 것이고 완벽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덤빈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 이런 정신나간 짓의 백미다. 벼르고 벼르던 홈통바위 위로 마침내 올라서서, 나는 퍽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아예 암벽 등반을 하지 않는 한, 이런 쾌감을 맛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계속)
(등반을 마치고 내려다본 홈통바위. 결코 미끄러지고 싶지 않은 사면이다)
(*홈통바위 위의 사진은 평지에서 찍거나, 움직이기 전에 가슴에 기기를 고정하고 녹화를 시작한 동영상에서 추출했습니다. 위험지역에서 스마트폰을 조작하다 기기 분실 및 인명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추신: 서울 등산로 추천 정리 페이지를 작성해서 조금씩 업데이트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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