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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으로 가는 길고 벅찬 길 1

-험난하지 않지만 지루하고 괴로운 길

by 이건해

2주 가량 또다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불안정한 생활에 대한 가족의 비판과 회유를 또 마주해야 했고, 금전 문제로 은행에 갔다가 완벽한 사회 부적응자가 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요 몇 년 사이 산에서 자유와 평화를 느끼고 이를 즐기는 방법에 대해 남에게 얘기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큰 틀에선 여전히 누추한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심지어 이 글을 쓰는 약 10개월 뒤에도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한편으로 잡다한 물건의 정리에 박차를 가해서 할 시간도 없는 게임기를 팔고, 입은 적이 없는 주황색 심파텍스 재킷도 팔았다. 게임기는 아쉬울 게 없었으나 재킷을 팔기는 아까웠다. 심파텍스는 고어텍스 못지않게 훌륭한 방수투습 소재고, 그 재킷은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신품 등산 장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중고로 구한 고어텍스 하드쉘이 두 벌 더 있고, 이럴 때는 이상하리만치 새 물건에 손이 안 가게 된다. 특히 가볍고 부드럽고 색깔이 튀지 않는 고어텍스 팩라이트 재킷을 더 찾는다. 아마 굳이 무슨 작정을 하기 전에는 심파텍스 재킷을 입지 않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팔아치우는 게 맞아서 깨끗이 처분했다.


그렇게 2주를 보내고는 주말에 배낭에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지참해서 도서관으로 갔다. 집에 있기가 피곤하고 위축되고 작업도 손에 잘 잡히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가 산에 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배낭이 누가봐도 ‘등산객’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물건이라 그대로 도서관에 가기는 퍽 민망했지만, 등산객 차림이면 남에게 방해가 된다고 쫓아내는 것도 아니다. 나는 도서관에 자리잡고 점심 때가 지나도록 번역을 하거나 졸았다. 맙소사. 대체 얼마만에 도서관에서 엎드려 잔 걸까?


두 시쯤 되자 슬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날의 목적지는 한참 미루고 또 미룬 남한산성이었다.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은 이미 여러번 봤는데 남한산성은 왜 여지껏 보지 않은 것일까? 이유는 두 가지다. 일단 서남권 사람으로서 좀처럼 갈 일이 없는 서울 동쪽 끝을 심리적으로 대단히 멀게 느꼈고, 게다가 남한산성은 내가 즐기는 종류의 암릉 능선과 거리가 먼 코스였기 때문이다. 과정은 힘들고 보상은 적으니 미룰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 수도권 산이라는 쿠키 상자에서 가장 맛난것들을 다 먹었으니 남은 것도 맛볼 차례다. 엄밀히 따져보면 쿠키 상자를 꼭 비워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근교 산을 다 가보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실행에 옮겨야 했다.


3시 좀 넘긴 시각에 마천역에 내려 지도를 보며 들머리로 걸었다. 그런데 한참을 걷다 뭔가 이상해서 다시 확인하니, 네이버 지도의 나침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반대방향으로 15분이나 걸었다. GPS문제로 겪은 난항이 제법 되지만 이런 식으로 지도를 뻔히 보고도 정반대로 걸은 건 처음이다. 덕분에 시작도 전에 살짝 짜증이 난 상태에서 움직여야 했다. 심지어 그렇게 한참을 걸어간 길은 재개발이 예정되어 텅텅 빈 대로변의 상가 옆길이었다. 차라리 사막을 걷는 게 나을 정도로 황량했다.


3시 41분쯤 들머리로 향하는 상점가의 입구에 도착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남한산성은 인기 있는 등산로인듯, 안내판에 상세히 적힌 코스도 1시간짜리부터 3시간 20분짜리까지 다양했고, 들머리로 가는 길에도 등산용품점이 많았다. 아마 휴일 아침에는 이 좁은 골목이 등산객으로 북적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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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사 옆 들머리. 도무지 큰 산의 들머리답지 않은 곳이다)


지도를 보고 제법 큰 절인 성불사에 들렀다가 그 옆으로 이어지는 들머리를 통해 등산을 시작했다. 이때가 이미 4시경으로,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오르막을 딛기도 전에 길을 헤매고 황량한 땅을 너무 오래 걸은 탓이다. 하여간 스마트폰만 믿고 다니면 낭패를 보게 되어 있다. 운전할 때 내비만 믿었다가 길을 잘못 드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 눈으로 본 다른 단서와 일치하는지 검증을 수시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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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녹으면 뭐가 될까요? 진창이 됩니다)


성불사 옆으로 올라가는 길은 흙길이었는데 눈이 거의 다 녹아서 엉망진창이었다. 문자 그대로 엉망으로 진창이었다. 덕분에 한동안 걸음걸음이 질퍽거렸고, 심지어 미끌댔다. 정말이지 걷기 싫은 길이었다. 이렇게까지 진창길에서 오래 휘청댄 적이 없었다. 슬슬 끝나겠지 싶어서 아이젠을 쓰지 않았는데, 같은 길을 다시 가라면 아이젠과 스패츠를 모두 차겠다. 관리할 물건이 늘어날지언정 질척질척한 땅에서 흐느적대는 건 사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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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하지만 좋은 계절의 그림자가 남아있다)


4시 40분쯤에는 산책로처럼 정비된 완만한 오르막길에 접어들었다. 정비되었다곤 해도 흙길 좌우에 밧줄과 나무로 목책을 세운 정도지만, 우거진 나무 사이로 길게 이어진 길은 봄가을에 끝없이 걷고 싶을 만한 풍경을 보여줄 듯했다. 나는 갈색 황량함이 지배하는 길을 홀로 걸으며, 본 적이 없는 이곳의 아름다운 날을 상상했다. 마치 멸망한 세상의 흔적같은 정취가 있는 길이었다.


5시 7분쯤부터는 아름다운 산책로가 끝나고 데크 계단이 이어졌다. 10분가량 줄기차게 이어지는 계단길로, 걷다보니 지쳐서 중간에 한 번 앉아서 간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수면부족도 원인 중의 하나겠지만, 마음 깊이 감동하는 풍경을 접하지 못한 채로 주구장창 오르막을 걸어온 게 결정적으로 피곤했다. 겨울 산의 무서운 점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즐길 만한 조망이 부족한데 암릉도 없고 침엽수도 적으면 즐길 건 없고 걷기는 힘든 길을 기약 없이 걷게 된다. 마치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보릿고개 같은 과정이다. 이런 건 실제 인생으로 충분하니 이제 겨울엔 바위산만 다녀야겠다......라고 생각했는데, 고도를 높여 데크길이 끝날 때쯤 되자 침엽수가 우거진 부분에 금빛 햇살이 비치는 광경이 마음에 안식을 주었다. 덕분에 저무는 해는 언제든 어디에든 아름다움을 덧입힌다는 걸 새삼 느꼈다. 내 인생에도 저런 존재가 있다면, 아마 그건 취미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등산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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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지루한 길이라도 아름다운 순간은 온다)


데크길이 끝나고 나자 이후로는 능선길이었다. 흙길과 데크 계단이 번갈아 나왔고 길의 절반 정도는 눈이 덮여있었다. 가까운 산의 모습이 보였지만 가히 아름다운 정도는 아니었고, 길도 과히 재미있지는 않았다. 침엽수가 우거지지도 않았고 암릉도 난간도 없었다. 그냥 눈 덮인 흙길이었다. 눈조차 없었다면 그야말로 무서우리만치 시시한 길이었을 것이다.


남한산성의 성벽을 마주하게 된 것은 5시 43분경이었다. (계속)


추신: 서울 등산로 추천 정리 페이지를 작성해서 조금씩 업데이트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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