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 포세, 박경희 옮김, 『아침 그리고 저녁』(문학동네, 2019)
나랑 산책 좀 하다 가요
욘 포세, 박경희 옮김, 『아침 그리고 저녁』(문학동네, 2019)
다시 살아보는 하루에서
어제 그리고 내일을 바라보는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정확히는 죽음 이후를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죽는 행위가 아니라 죽음 만을 생각한다면 어딘가 게임의 끝처럼 서비스 종료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어떤 철학자는 사람의 삶이란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이며 그 끝에는 죽음이라는 최종 관문이 있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궁금해진다. 죽음이라는 관문 너머에는 무엇이 있고 그전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문을 열었는지. 그리고 문을 여는 과정에서 만나는 찬란한 세계를 무엇이라 설명하는지도 알고 싶어진다.
그래요. 아이가 우는 건 좋은 거예요, 늙은 안나가 말한다
잘하고 있어요,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지, 그래야지, 그녀가 말한다
네 그런 거군요, 올라이가 말한다
그래 그런 거예요, 늙은 안나가 말한다
1부 24p
욘 포세의 소설은 탄생과 죽음을 다룬다. 1부는 탄생을 했던 순간만을 다루는데, 주인공인 요한네스의 아버지 올라이가 문 앞에서 서성이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노르웨이 해안 마을에서 요한네스가 태어나기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의 손과 기도가 반복되어 등장한다. 아내나 산파의 호흡, 올라이의 기도 그리고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가득한 문장들의 연결. 지극히 평범하고 특별할 게 없는 서사는 오히려 독자에게 삶이 자극적인 사건 몇 개로 특정할 수 있는 포인트가 아니라 은하수처럼 잔잔하면서도 찬란한 과정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을 더욱 부각하는 것은 인물들의 대사이다. 말과 말 사이에 자리하는 커다란 공백. 설명을 붙이지 않아서 더 멀리 있는 어떤 생각을 가져올 수도 있고, 있는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도 있게 하는 대사들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삶의 모습을 다룬다. 어쩌면 인생은 많은 설명이 필요한 장르가 아닌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군요'와 '그랬었군요'로 정리할 수 있는 순간들, 그래서 멈추지 않고 흐를 수 있는 나날도 있는 것이다.
위험한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위험하지는 않아,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하다는 것도 말 아닌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아픈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곳엔 몸이란 게 없다네, 그러니 아플 것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하지만 영혼은, 영혼은 아프지 않단 말인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2부 131~132p
2부에서는 요한네스의 죽음을 다룬다(내용의 스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는 죽음 직전의 모습이다. 노년의 요한네스는 자신이 평소에 했던 것을 그대로 반복한다. 산책을 하거나 시장에 간다. 그리웠던 페테르를 만나고 그에게 너머에 관해 묻는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요한네스에게 있어서 끝없이 계속되는 또다른 삶의 모습처럼 보인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손에 쥔 것 없이 없음의 상태로 끝나더라도, 욘 포세가 구사하는 쉼표와 쉼표 사이의 공간처럼 어떠한 여백이 존재함은 분명하다. 요한네스는 그 자그마한 여백, 즉 삶에서 아주 작고 빛나는 의미 하나를 찾으려고 잔잔한 생활의 모습을 계속 돌아보고 걸어보고 생각하는 듯하다.
삶은 자그마한 여백을 넓히는 과정인 것 같다. 하지만 여백은 여백일 뿐. 아주 작고 희미해서 우주적으로 본다면 쥐콩보다 작다. 하지만 사람은 더 작아서 여백이 아주 넓은 것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뛰어놀고 그림자를 만드는 나무를 심거나 다채로운 것들로 채울 수 있다. 사람이 없더라도 여백은 존재할까. 왠지 존재할 것만 같다. 요한네스가 배를 타고 어느 지점을 넘어가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그의 자식들은 요한네스와 함께 살았던 삶을 자신들의 여백에 수놓고 살아갈 테니까. 기억과 마음은 오래도록 인간의 곁을 떠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