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폴링 인 폴』(문학동네, 2024)
미지의 빛 너머를 보는 눈
백수린, 『폴링 인 폴』(문학동네, 2024)
오해의 씨줄과 이해의 날줄을 엮어
섬세하게 다가가는 백수린의 언어
문학동네 온라인 독서 커뮤니티 '독파'에서 진행하는 5,6월의 독서로 10주년 기념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된 백수린 소설가의 『폴링 인 폴』을 읽게 되었다. 2014년에 출간되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을 그대로 두었다. 추가된 내용은 개정판 작가의 말과 서영채 평론가와의 대담. 10년이 지나 다시 처음을 바라보는 작가와 그런 작가의 첫 소설집 평론을 쓴 평론가의 대화는 어딘가 더 단단하고 옹골찬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귀한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볼수록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아주 예전에 읽었던 책을 들여다보곤 한다. 가령 20년 전에 출간된 책이나, 내가 읽고 몇 년을 책장에 가만히 두기만 한 책들. 그 책은 손에 쥐기만 해도 당시의 기분이나 주변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시간을 머금고 있는 물건들은 자연스레 이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예전에 출간된 작품을 읽는 행위는 이러한 경과를 감각하는 것 말고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에게는 그 작품이 발표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 편이다.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작품이라면, 당시의 사회문제가 지금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또는 심화되었는지. 그러면 사랑은? 태도는? 물성이 없는, 오로지 감각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지점들은 내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여전히 이 지점은 나에게 숙제다. 하지만 굳이 의미를 찾지 않아도 좋다. 문학은 의미가 없어도 되니까. 존재 자체가 힘이 되기도 한다. 거기서 다시 의미가 발생하니까. 내게 백수린의 첫 소설집 『폴링 인 폴』은 존재 자체가 의미를 만들어 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귀중히 떠서 건네는 처음의 새하얀 마음"(「개정판 작가의 말」)을 보는 것부터가 이 소설의 시작일 것이다.
그는 아마도 울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아려왔다. 그녀는 술에 취해 하천으로 뛰어드는 사람의 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비단,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것 하나뿐일까
「부드럽고 그윽하게 그이가 웃음 짓네」 98P
백수린의 첫 소설집 『폴링 인 폴』의 주된 요점은 소통이다. 무언가 말을 하지만 닿지 않는 불통. 언어가 다르거나, 아예 소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등단작인 「거짓말 연습」에서는 유학을 떠난 주인공이 체류하거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지를 고민하는 상황에서 거주하는 기숙사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 소설은 외국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표제작인 「폴링 인 폴」은 외국인 유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주인공이 유학생에게 사랑에 빠지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을 잘 포착해 냈다. 앞서 「거짓말 연습」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주인공을 외부와 멀리 배치해 벌어진 간극을 소설적으로 잘 풀어내는 듯하다. 이후의 소설들도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이 있다면 그 주인공 주변으로 주인공과 멀리 있는 듯한 느낌을 주게 하는 배치, 가령 외국, 외국인, 장애, 디스토피아 등 좁힐 수 없을 듯한 간극을 소설에서 좁히려는 시도들이 매력적이었다. 그것이 백수린의 언어로 하는 시도여서 더욱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년대 이후의 소설들은 당찬 느낌이 강하다. 당차서 자신이 스스로 타자에게 다가가려 하고 문제를 극복하려 한다. 주된 움직임이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 하지만 백수린의 소설은 시대의 문제로 인해 당차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강하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10년대의 당참과 20년대의 당참의 차이는 어떤 차인가. 작가가 인터뷰(「눈부신 처음으로부터 - 『폴링 인 폴』 재간에 부쳐」)에서 스스로 언급한 바 있는데, 작가 자신이 정적이고 우울감이 있는 여성이 나오는 소설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를 좋아한다고 해서 소설에 그대로 대입하진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 『폴링 인 폴』에서 나타나는 인물은 20년대의 당참에서 스스로 세계를 재건하려는 인물들의 당당함보다는 타자에게 다가가고 타자를 이해하려는, 내가 있어서 타자가 있는 것보다 타자와 내가 함께 이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그러니까 믿지 못할 세상을 다시 만들겠다는 최근 20년대의 당참보다는 아직 세상을 믿는 듯한 따스한 느낌. 이 느낌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전부는 아닐까, 그렇게 오해해도 좋을 듯한 느낌이 든다.
독서를 아직 10년도 못했기에 못 읽어본 작가가 많다. 내게 백수린이 그렇다. 이번에 좋은 기회로 백수린의 첫 마음을 읽었고 이후가 궁금해진다. 내가 읽은 이 작가가 10년 동안 어떻게 성장했을까. 어떤 소설을 써서 지금의 대작가가 된 걸까? 과거를 읽는다는 것은 이래서 좋다. 이 소설의 미래가 내가 아는 과거라는 것. 그래서 조금 더 꿈꾸면서 그의 커다란 발자취를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어서, 기다리지 않아서 좋다. 얼마나 눈부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