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안 일리스, 한경희 옮김,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
목 끝까지 찬 어둠 속에서
사랑은 어떤 역할을 맡는가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플로리안 일리스의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이 출간되었다. 일기, 편지, 잡지, 신문, 그림, 사진 등 수많은 자료로 베를린 황금기의 끝자락인 격동의 10년을 문화사적으로 의미 있는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로 풀어낸다. 세계사적으로 가장 불행했던 시기인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10년, 1929년~1939년까지의 기간을 다룬다. 당시 뉴욕 증시 폭락, 즉 경제 대공황을 시작으로 나치즘과 파시즘이 부상하고 모든 것이 악화되었던 불행의 시대다. 희망도 미래도 없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플로리안 일리스는 샤르트르와 보부아르,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와 젤다 피츠제럴드 같은 소설가들부터, 피카소, 달리 같은 화가나 한나 아렌트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와 과학자 등 다채로운 인물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을 담아냈다.
문학동네 온라인 독서 커뮤니티 '독파'의 은혜로 북클럽문학동네 7기가 되었다. 북클럽문학동네에서는 가끔 티저북 또는 단행본 서평단 이벤트를 하는데, 이번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의 티저북 서평단에 당첨이 되어 이 서평을 쓴다. 티저북에는 일부의 내용만 담겨 있다. 빠진 텍스트들은 더 매력적일 듯하다.
1998년에 태어난 나는 2000년대의 조각난 기억과 2010년~2020년의 어느 정도 확실한 기억을 가진 채 2020년대를 살아가고 있다. 나의 데이터베이스에 입각해 지금의 세상을 바라보고 감히 말하지만, 대 혐오의 시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쉽지 않다고 말하지만, 점점 쉽지 않은 세상이 될 것만 같다. 희망이 정말로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유는 과도한 발전에 있다. 항상 생각하지만, 인류의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와 인류의 문화적, 사회적 배경이 발전하는 속도가 같아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기술의 발전은 너무 빠르고, 인류의 내면 성장은 아주 더디다. 여기서 발생하는 격차를 충분히 이해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받아들이는 태도를 배우지 못했기에 유일하게 학습된 혐오를 통해 타인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이 점은 매우 안타깝지만, 절대 개선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적어도 2020년대는 그런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사랑을 톺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사회/문화적으로 서로를 미워하고 힘들어하지만, 상황만 놓고 보면 20세기는 정말 게임 난이도로 치면 극악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발전을 이루어내고 서로를 사랑하며,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태도로 타인을 바라보는 장면을 본다면 분명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저자인 플로리안 일리스 또한 이 점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닥친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두려움과 분노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 같다. 지금도 전쟁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젠더 갈등은 여전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도피처를 삼는다. 저자의 말 중에서 "1920년대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것은 흥분제였다"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19를 20으로 바꾸어도 똑같이 적용된다. 흥분제를 얻은 과거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어떻게 활용했고, 일상에서 어떻게 다루었기에 지금의 내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걸까?
험난한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 오죽하면 '6.25 때도 사랑을 한다'라는 말이 있을까. 100년 전에도 이 말은 유효하다. 사르트르의 자유연애로 괴로워하는 보부아르, 동성의 연인과 사랑에 빠진 아내 젤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정신병에 걸리고 남편인 스콧 피츠제럴드는 슬퍼한다.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사랑하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도 잊지 못해 새 사랑을 시작한다. 시인 고트프리트 벤의 바람으로 그의 여자친구는 자살하고 벤은 여자친구의 친구와 새 연애를 한다. 테니스 선수 고트프리트 폰 크람은 결혼했지만 동성 애인이 있고 그의 아내는 남편의 복식 파트너와 애인 사이다. 줄줄 풀어냈지만, 내용을 보면 지긋지긋하다. 혈압이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방대하고도 지리멸렬한 사랑에는 의미가 있다. '냉전'의 시대의 불같은 사랑은 방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위대한 사람들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사랑을 하고 바람도 피고 죽고 울고 분노하고 기뻐한다. 새로운 것이 전혀 없어서 한 사람의 사랑은 여전히 새로울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등불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야만의 시대는 다시 올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자들의 얼굴에서 시대를 읽어내는 일 만큼 의미가 있는 일은 몇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앞에서 지금을 치유할 수 없는 시대라고 명명한 나 역시도 사랑이라는 열쇠가 우리 앞에 꽉 닫힌 문을 열어주리라고 믿고 있다. 그 믿음이 없다면 정말로 우리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좌절이 눈을 가릴 것이고, 혐오와 멸시라는 칼을 손에 쥔 채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마구 베며 다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믿음이 칼을 지팡이로 만들 수도 있고 안대를 안경으로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은 그런 거니까. 증오의 시대에 광기의 사랑이라는 각성제로 우리 또한 지금의 힘듦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