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글/D7
오늘의 주제는, 여행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가장 기억이 남는 여행은 2016년 6월 중순 떠났던 3주간의 스페인 안식 여행입니다. 그중 40%는 친구와 나머지 60%는 혼자 여행을 했기에 종종 일기를 남겼는데요, 그중 가장 극적인 날의 일기가 있어서 약간만 수정해서 옮겨봅니다. (문맥상 각주 달고 싶지만 복잡해서 괄호로 설명을...)
Day16. Ibiza에서 Malaga로 이동하는 날
어젯밤 이비자의 대미를 장식해줄 우슈아이아(Ushuaia, Ibiza에서 최근 제일 핫한 호텔 클럽)에서 아이폰을 분실했다. 그것도 정말 들어가자마자 바로... 하아...
지난 일주일 동안 이비자에서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기도 했고 또 우수아이아에 오면서 Hardwell(EDM artist)을 본단 생각에 너무 업된 나머지 잠시 방심한 사이에 벌어진 일. 없어진 거 알아차리기까지 3분 걸렸나? 순간 이게 정말 꿈이기만 바랬다. 너무 청천벽력.
여행 관련 예약 정보, 지도, 사람들과의 커넥션, 사진과 동영상.... 여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게 폰 안에 다 있는데 그것이 사라진 거다.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고 이미 벌어진 일이고, 멘붕인 상황에서도 '예약 정보는 이메일 뒤져서 프린트하면 될 거야', '이비자에서 아이폰을 새로 사자' 등등 메이크업 방안을 생각하다가, 그래도 기왕 온 우슈아이아에서 기분을 좀 풀어보려고 11시 정도까지 있어봤지만, 사실 너무 중요한 물건을 분실했다는 충격과 함께 밀려오는 어마어마한 자책감에 호텔로 오는 내내 보이는 남자들이 다 무섭고 이 환락의 동네가 너무 원망스럽고 남은 여행에 대한 자신감은 사라지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만 들었다.
게다가 이비자 온 후로 와이파이 연결이 안대서 자동 백업이 한 번도 안되었을 거라는 것까지 떠올린 순간, 이비자에 있었던 일주일 간의 사진이 모두 날아갔구나.. 너무 아까워 미칠 것 같아서 마음의 평온은 저저저 멀리로...
호텔방에 돌아와 제인과 한참 옛이야기를 하며 맘을 달래다가 씻고 짐을 싸고 누웠지만 잠을 잘 수없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꾸물꾸물 올라왔다. 마지막 여행지인 Granada에서 과연 혼자 지낼 수 있을지, 내일 경찰서 가서 폴리스 리포트 잘 쓸 수 있을지, 아이폰을 만약 내일 못 사면 폰 없이 Malaga 혼자 갈 수 있을지, 오만가지 걱정과 망상들이 마구 자라났다. 아침이 되니 제인도 악몽에 시달려 잠을 거의 못 잤다고 하고... 그렇게 이비자의 마지막 밤은 엉망이 되었다.
오전 중에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공항에 가야 했던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체크아웃하고 짐을 맡기고 경찰서로 향했다. 영어가 잘 안 통하는데 키보드마저 독수리 타법으로 한 자 한 자 눌러 적는 꽃미남 에스파뇰 경찰관과 리포트를 작성하는 건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와중에 보험사 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 그거 알아내느라 난리... 폰 시리얼 넘버를 몰라서 폰을 못쓰게 막아버리지 못해 또 아쉽고...
휴, 그래도 어찌어찌 리포트를 받아 들고 버스를 타고 이비자 타운의 애플스토어를 찾으러 갔다. 호텔 리셉션에서 지도에 표시해준 것보다 멀어서 한참을 찾고, 그래도 가게 들어서자마자 아이폰6S 핑크 128기가를 달라하여 일시불로 바로 결제. 다행히 따로 넣어둬서 분실하지 않은 한국 유심칩을 넣고 폰 시작해서 인터넷 되는 것까지 보고 나와서 택시 정류장을 찾아 뛰었다. 비행기 시간이 얼마 안 남은 제인도 마음이 급하고...
택시 타고 호텔로 달려가서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고 짐 찾아와서 다시 택시를 타고 공항에 도착하니 딱 12시.
다행히도 그때부터는 체크인도 다 원활하고, 폰은 인터넷도 돼서 카톡도 깔고, 점심도 먹고 그러면서 와인도 마시고, 다 문제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제인이 먼저 비행기를 타러 들어가고 내 짐을 부쳐보니 딱 20킬로. 무게 초과 문제도 없고 난 이제 걱정할 게 없다.
내 비행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은 나는 폰에 천천히 필요한 앱 하나씩 깔면서 책 읽기에 돌입했다.
'예언자'와 '반응하지 않는 방법'을 번갈아 읽으면서 폰을 잃어버린 사건과 그래서 이비자에서의 사진을 날린 것에 대해 생각했다. 제인이 어제 그랬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큰 일 아니야. 괜찮아.' 어젯밤에 잠이 안와 망상의 날개를 펼친 것에 비하면 사실 이 사건은 그렇게 집착할만한 큰 일은 아니라는 거... 물론 돈으로 지난 일주일간의 사진을 구해내진 못했지만, 구글 포토 덕분에 이비자 이전 리스본과 세비야 사진까지는 모두 백업이 잘 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비록 폰을 잃어버렸을 때는 이비자가 너무 싫어지고 집에 가고 싶었지만, 사실 그것만 빼면 이비자에서의 있었던 일들은 대부분 다 훌륭했다. 여러 party 중에서 최고였던 form party espuma가 있었고, 엄청나게 멋진 지중해 해변 Cala compta를 다녀왔고, 이비자 택시마다 나오는 음악이 얼마나 힙하고 신났던지. 오늘 택시 아저씨는 또 얼마나 친절했나, 우리 내릴 때 심지어 아리가또 해줬고 ㅎㅎ. 공항에서 부엘링 체크인 아줌마 내가 한국인인 거 알고 너무 신나게 나에게 '감사합니다'라고 해줘서 정말 의외였지만 기분이 좋아져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공항에 동양인 너무 없고 모두들 나를 구경하는 눈초리로 보지만 whatever...)
그래, 이비자 마무리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마음을 비우는 책도 읽고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폰 분실은 정말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내 여행을 다 망칠 수는 없다.
마지막 날 오후 내내 공항에서 독서만 했지만, 그 시간은 아깝지 않은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혼자 밖에 나돌아 다닐 정도의 에너지는 없었으므로...
2시간 후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Malaga에 도착하니 또 왠지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기분이 든다. 평화롭고 차분한 이 도시를 보니 여기엔 또라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저 당시 곧 다시 혼자 여행을 해야 했던 저에게 폰 분실은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여행에서 생긴 일 중 가장 큰 얘깃거리가 되기도 했답니다. 이비자 애플스토어에서 사 온 아이폰6S는 그 후로 액정만 3번 깨트렸고, 한 번은 택시에 놓고 내려 20만 원 주고 되찾기도 한... 그런 애증의 폰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3년 더 쓸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