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예전에 안상수 선생님 디자인 연구실에서 여권 디자인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전자 여권 도입을 계기로 기존 여권 디자인을 리뉴얼하는 일이었어요. 이 프로젝트는 안상수 선생님을 비롯해 서울대 김수정 교수님, 601비상 박금준 대표님, 스튜디오 바프 이나미 선생님 등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10명을 선별해 지명 공모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안상수 선생님 디자인 팀에서 여권의 표지 디자인과 내지 타이포그래피를 맡았습니다.
사실 여권 표지와 내지는 생각보다 구조가 단순합니다. 복잡한 위계나 정보, 타이포그래피, 장식적인 요소들이 많지 않습니다. 저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6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정말 많은 레이아웃과 그리드, 타이포그래피를 실험했어요. 매일 눈을 뜨면 작업을 시작해서 작업을 마치며 눈을 감았습니다. 출력된 시안은 책장 하나를 거뜬히 채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명 공모의 결과는 김수정 선생님과 안상수 선생님의 디자인이 나란히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는 노력에 보상을 받은 느낌이라 너무 행복했고 감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민들의 반응은 너무 냉담했습니다. 기대를 가지고 좋은 피드백을 상상했지만 결과적으로 상처였고 수상의 기쁨보다 자괴감이 앞섰습니다. 그 이후 어떤 스토리가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결국 10년이 훨씬 지나서야 김수정 선생님의 디자인을 중심으로 새로운 여권 디자인이 적용되었습니다.
사용자들은 기존의 서비스 혹은 브랜드에 이미 애착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큰 변화를 반기지 않고 이 변화에 자신이 배제, 혹은 소외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합니다. 새로움으로 기존의 익숙함을 뛰어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최근 리뉴얼된 토스, 이니스프리, 샤오미 등의 브랜드 로고타입 작업에서 공감, 응원과 격려보다 비판과 비난이 앞섰던 것도 어찌 보면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새로운 서울시 브랜드 로고 관련 이슈는 너무 과도하게 과열된 것 같습니다. 물론 관심도 좋고 생각할 거리와 논쟁의 거리들이 생긴 것도 너무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형이나 감각, 완성도 등 디자인 자체를 비난하는 원색적인 비판보다는 이렇게 디자인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구조, 현상을 비판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물론 이해가 되지 않고 화가 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되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