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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씨 Jan 09. 2020

치앙마이에서 내가 행복했던 이유

퇴사자의 치앙마이 살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치앙마이에서 살아본 두 달을 포함해 79일간 태국에서의 시간을 정리하고 다음을 도모하는 기간을 두기로 했다.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왜 내가 치앙마이에서 행복했었는지’ 좀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하나, 시간의 여유


나는 원래 움직임이 느린 편이다. 걸음도 느리고, 밥을 먹는 속도도 느리다. 일상의 소소한 움직임들이 다 느려서 ‘넌 언제나 느린 배속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빨리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에 가끔은 지치곤 한다. 빠른 세상 중에서도 더 빠른 IT 분야의 디자이너라는 직업적 특수성도 한몫하는 듯하다. 그런데 태국에 오니 세상의 모든 속도가 조금씩 느리다. 한국에서 쏟아지듯 밀려들어오던 뉴스와도 각종 사건사고와도 조금 떨어져 있다. 사람들도 물건들도 나에게 맞는 속도로 느릿느릿 흘러간다.

치앙마이에서는 음식점에서 음식이 늦게나와도 직원들이 초조해하지 않는다. 외국인 손님이 다그치기라도 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가게 주인들은 10시가 되도록 가게를 열지 않는다. 느지막이 원하는 시간에 오픈하고 일이 있으면 빨리 퇴근하기도 한다. 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동남아 특유의 느긋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게 조금씩 느리고 느긋하다. 하긴 그만큼 더운 날씨에서는 사람이 느려질 수밖에 없겠다. 세상이 다 빨리 돌아가는데 나만 느린 기분이 아니라, 모두가 나와 같이 느긋한 (혹은 나보다 느린) 속도감에 있다는 점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둘, 이동의 자유


치앙마이는 도시가 크지 않다. 웬만하면 오토바이를 타고 5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가는 것도 넉넉잡아 20분이면 충분하다. 한 번의 이동은 오토바이로 5분에서 10분이면 끝난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일산에서 서울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10분, 버스가 서울에 당도하는 데 1시간이 걸렸다. 오랜만에 1시간이 넘게 버스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앉아있자니 가슴이 답답하고 지루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스마트폰으로 의미 없는 유튜브를 뒤적거리다 그마저도 멀미가 나서 그만뒀다. 버스에서 내리고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는데, 갈아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자마자 다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앉을자리는 커녕 서 있을 공간도 충분치 않을 듯 한 그 지하철로 사람들이 사람들을 욱여넣고 있었다.

나는 이런 출퇴근길을 왕복 3시간씩 매일 반복했었다. 무려 5년이 넘도록 일산에서 서울역으로, 용산역으로, 마곡역으로. 그때는 내가 장거리 출퇴근길을 꽤 잘 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었나 보다. 치앙마이에서의 2달은 5년의 출퇴근이 무색하게 '교통 스트레스'가 얼마나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셋, 약속의 부재


지인이 없는 곳으로 떠나니 약속을 잡을 일이 없었다. 나는 친구 만나기를 좋아하고 내가 주도해서 모임을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약속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는, 내향적인 면과 외향적인 면이 공존하는 사람이다. 사람들과 만나 신나게 놀고 싶다가도 막상 약속시간이 다가오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혹시 약속이 취소되진 않을까 내심 기대하게 된다. 약속시간에 맞춰 미리 일어나고, 준비하고, 이동해야 하는 것들에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 놓고 막상 만나면 제일 신나게 놀지만.)


인간관계가 최소화되니 편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약속이 없으니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준비하고 싶을 때 준비할 수 있었다. 약속 장소에 맞춰 하루 일정을 짜고 동선을 계획하고 연락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그 날의 컨디션에 맞게 끌리는 곳으로 향해서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나를 위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대신 SNS를 시작했다.

온라인으로 대화를 잘 안 해서 카톡 답도 느리고 그 흔한 인스타그램도 안 하던 사람이었지만, 치앙마이에서 실제로 만나는 친구들이 없으니 대신 온라인 소통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으니 간혹 외롭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친구를 같은 기간 동안 안 만나더라도 한국에 있을 때와 멀리 바다 건너에 있다는 사실은 조금 다르게 와 닿더라. 이럴 때 SNS는 외국에서도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어주었다.



넷, 꾸미지 않는 것


여행지에서는 소위 '인생 사진'을 건지겠다며 렌즈를 끼고 화장을 했다. 직장인일 때는 아침마다 그 날의 일과에 맞으면서도 최근에 입은 옷과 겹치지 않는 옷을 골라 입었다. 피곤하더라도 언제 갑자기 생길지 모르는 미팅이나 보고가 걱정돼 화장은 조금 해야 했다. 하지만 여행지이자 일상이기도 한 치앙마이에서는 모두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내가 참석해야 할 회의도 업무상 만나야 할 만남도 없었다. 그리고 너무 더웠다. 더우니까 녹아 없어질 화장도 하기 귀찮아졌고, 안경을 끼든 렌즈를 끼든 신경 쓰이는 사람도 없었다. 더우니까 옷도 꾸며 입지 않게 됐다. 오토바이를 타기 좋게 편하면서도 시원한 몇 벌을 계속 돌려 입었다. 특히 태국의 코끼리 바지가 안성맞춤이었다.

아침마다 태국에서 산 로션 하나에 선크림을 바르고 가끔 립 틴트를 들고 다니는 정도가 화장의 전부가 되었고, 코끼리 바지 몇 벌과 여름용 면 티 몇 벌 만으로 돌려 입으니 오늘은 뭘 입어야 하나 고민하고 스트레스받는 게 줄어들어서 좋았다.

물론 가끔 꾸미고 싶은 날 '왜 이렇게 입을 옷이 없지?'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이건 한국에선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이니까 뭐.



다섯, 돈 부담이 없는 삶


치앙마이는 물가가 싸다. 이건 내 마음의 여유에 큰 영향을 끼친다. 길 가다가 마음에 드는 어느 식당이든 편하게 들어가 어떤 메뉴도 시킬 수 있고 메뉴 실패에 대한 부담도 없다. 꽤나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가더라도 매번 가격을 비교할 필요가 없다. 해외여행을 가면 으레 통장 잔고를 걱정하면서 가성비가 좋은 식당을 찾아가고 실패할까 고민하면서 신중하게 메뉴를 고르는 일들도 꽤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식당은 저렴하고, 메뉴는 실패할 일도 없지만 (개인적으로 태국에서는 맛없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혹시 실패하더라도 다른 메뉴를 더 시키면 된다. 각종 일상품들도 마찬가지. 고민 없이 지출하고 하루를 보낸 다음 매일 가계부를 써서 소비내역을 확인했다. 생일 같은 특별한 날 일부러 비싼 곳을 찾아간 날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생각보다 훨씬 덜 썼다. 이렇게 하루, 일주일 내역을 확인하고 나면 '생각보다 더 써도 되겠는데?' 싶어 진다.



여섯, 화내지 않는 나라


치앙마이에서는 교통상황이 아무리 안 좋아도 빵-하는 경적소리가 자주 들리지 않는다. 만약 소리가 들린다 하더라도 나를 위한 ‘조심해’ 수준인 경우가 많다. 어느 가게나 상황에서도 화내는 태국인은 보기 힘들다. 더운 날씨와 느긋한 성정도 한몫했겠지만, 어느 날 식사를 위해 들른 식당 'Aroy Dee'에서 사장님이 설명해주신 이야기에 따르면 종교적 이유가 크다고 한다. 불교에 뿌리를 둔 만큼 윤회사상을 믿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나 동물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한다. 치앙마이에서는 길고양이가 사람을 피하기는커녕 먼저 다가와 애교를 부리거나 배를 드러내고 눕기도 했고, 유럽 등지에 여행할 때마다 느꼈던 소매치기나 사기꾼에 대한 경계심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핸드폰을 어디 두고 오기라도 하면 찾아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도시에 가든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도시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주곤 한다. 치앙마이의 사람들은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 지내는데도 편안함을 느낄 만큼 좋은 이미지를 주었다.




사실은...




사실은 이 여섯 가지 항목들이 모두 치앙마이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한국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좀 더 일상에 시간적 여유를 둔다면, 이동과 약속에 대한 노력을 내가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때에만 집중하고 최소화한다면. 꾸미지 않아도 당당하게 다니고, 서로 화낼 일 없고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한다면... 그러니 어쩌면 이 리스트는 '치앙마이에서 행복했던 이유'가 아니라 '치앙마이에서 찾은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들'일지도 모르겠다.




 






잘 다니던 대기업에서 퇴사하고 자발적 방황기를 가치고 있는 디자이너 ‘다섯씨’ 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근근이 프리랜서 일을 하면서 치앙마이에서 두 달, 태국에 79일을 머물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지금은 포르투갈에서 살아보고 있습니다. 글쓰기에 게을러서 브런치 글은 실제보다 아주 천천히 올라옵니다. (언제쯤 브런치도 포르투갈로 올 수 있을지...!)


포트폴리오는 아주 느리게 비핸스에 업로드되고 있습니다. - www.behance.net/kimdasol

가-끔 내킬 때 그림일기도 그립니다. - www.instagram.com/o3okang

매거진의 이전글 치앙마이를 조용히 떠나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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