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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씨 Dec 26. 2019

엄마가 치앙마이에 왔다.

퇴사자의 치앙마이살이

퇴사자의 치앙마이살이


치앙마이 두 달 살기의 어느 날, 평소처럼 카페에서 일을 하다가 저녁 늦게 엄마랑 오랜만에 카톡을 했다.

일상적 대화를 하다가 엄마가 ‘도자기를 안 했으면 엄만 우울증 걸렸을 거야. 요새 우울해.’라고 하셨다. 남동생이 군대에 가서 집을 비웠을 때도 우울해하셨었는데 딸마저 집을 비우고 한 달이 넘게 지났으니 그러실 만도 했다. 그래서 내가 있는 동안 치앙마이에 오시라고 비행기 끊어드리겠다고 말하고 직항 비행기를 찾아봤다. 엄마는 혼자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고 무서워하실 수 있으니 경유는 절대 안 되니까. 다행히 대한항공과 제주항공에서 치앙마이 직항 편을 운행하고 있었다. (나도 방콕을 경유해서 왔었는데) 그런데 다음 주만 돼도 연휴가 껴있어 좌석이 없거나 너무 비쌌다.

 

유일하게 괜찮은 항공편은 당장 내일 3시에 출발하는 것뿐. 해외여행은 반년 전에 계획하고, 짐은 최소 2주 전부터 싸고, 주로 단체 패키지를 다녔던 엄마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안된다고 하실 것 같긴 했지만 일단은 꼬셔봤다.


    딸이 다 안다.

    짐도 필요 없다.

    숙소도 많고 환전도 필요 없다.

    백팩에 여권이랑 속옷만 챙겨 바로 오셔라.


처음엔 내일 출발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다음에 같이 가자고 하셨는데, 계속 미끼를 던지자 30분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시더니 결국에는 엄마의 치앙마이행이 결정되었다! 이후 30분 안에 엄마의 비행기 결제도 끝내버렸다. 환불불가. 부산도 아니고 치앙마이를 반나절만에 급 오게 되다니?!




그렇게 갑자기 엄마가 치앙마이에 왔다. 나만 믿고.




엄마는 다음날 홀로 공항으로 출발하여 3시 비행기를 타셨다. 나는 밤새 일주일간의 코스를 짜고, 일어나자마자 태국 입국신고서 적는 방법을 이미지로 정리해 보내드리고, 당일 좋은 호텔 2박을 예약한 다음, 저녁 7시 도착에 맞춰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입국장에서의 초조한 기다림 끝에 '왜 전광판에 Arrived가 뜬 지 한참이 지나도 안 오지? 문제 생긴 건 아니겠지? 엄마 핸드폰도 안될 텐데 어떡하지!' 엄마가 정말 아주 작은 백팩 하나만 달랑 맨 채 도착했다.




작은 치앙마이의 국제 공항. 엄마가 보내준 짐 사진 (정말 작은 백팩 하나!)






단기 거주자가 아니라 다시 여행자의 시선에서 본 치앙마이


여행 첫날은 급하게 성사된 이 이벤트에 신나고 너무 즐거워 약간 흥분상태로 보냈다. 두 달을 지내면서 엄마가 좋아할 것 같은 물건과 장소들이 많이 눈에 띄었었는데, 실제로 보여드릴 수 있게 되어 신이 났다. 아는 곳도 많으니 6일 안에 어디 어디를 가야 할지 후보도 넘쳐나 줄이기도 힘들었다. 두 달간 찾아보지도 않았던 투어도 신청해보고 잘 가지 않았던 관광지들, 쇼핑 장소들을 열심히 체크해두었다.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는 엄마를 위한 맞춤 관광지 : 반캉왓, 갤러리 시스케이프, Woo Gallery Cafe



엄마와 함께하는 여행은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사실 치앙마이의 대표 관광지는 사원이지만 관심이 많이 떨어져 '도이수텝'만 가보고 더 이상 가지 않고 있었는데 (치앙마이에는 사원이 굉장히 많다.) 엄마와 함께 유명한 사원,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조그만 사원들을 구경했다. 엄마는 불교와 미술에 대한 지식이 있으셔서 이야기를 들으며 감상하니 감흥이 없었던 사원이 새롭게 다가왔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며 나 혼자 왔더라면 있는지도 몰랐을 작은 조각들, 풀꽃들, 그림들을 엄마가 발견하셔서 함께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특히 쇼핑이 훨씬 재밌어졌는데, 이미 몇 번을 지나다니면서 신경 쓰지 않았던 물건들을 엄마와 함께하니까 더 잘 보이고 훨씬 싸게 느껴졌다. 나는 그냥 봐서는 어떤 천이 좋고 어떤 게 비싸고 고급스러운 물건인지 잘 모르는데 엄마는 '이런 천으로 된 옷은 한국에선 10만 원 넘어.' '이건 질이 좋은 거야.' '이건 별로 안 좋은 거야.' 경험에서 우러나온 정보를 말해주셔서 쇼핑 품목이 전보다 훨씬 늘어났다. 캐리어가 더 찰 수록 치앙마이가 풍요롭게 느껴졌다.



시장이란 시장은 다 섭렵하는 중 : 와로롯, 러스틱 마켓




내가 이것저것 치앙마이에 대해 설명해주는 재미도 있었다. 원래도 부모님과 해외여행을 다니긴 했지만,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사전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과 실제 내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를 해주는 건 달랐다. 내가 주로 일하는 곳이 어딘지, 주로 어디서 뭘 먹는지, 어느 동네에 자주 다니는지, 여기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이야기해드렸고 엄마는 '나'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으셨다.






그런데 둘째 날이 되자 기분이 급격하게 차분해졌다.


셋째 날엔 왠지 모를 우울감까지 느껴져서 의아했다. 우울할 이유가 없어서 도대체 왜 그럴까 생각하며 카페에서 창 밖 거리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문득 이유를 깨달았다.




곧 이 곳을 떠날 것이라는 것이 실감이 난 것이다.




카페에서 내다보이는 일상적인 이 풍경이 곧 헤어질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까지 나는 외국에서 이렇게 오래 지내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모든 해외는 다 기한이 짧고 분명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 그 안에서 최대한 즐기던 '여행'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두 달을 지내면서 ‘기한이 없는 당연한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어떤 스케줄도 미리 계획하지 않고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서는 그 날 날씨를 보고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움직였다. 하루가 그저 숙소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거나, 과일이 먹고 싶으면 과일시장에 들러 사 와서 먹어보는 정도로 끝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두 달째에 접어들고 치앙마이가 익숙해지자 특별함이 떨어지고 감흥이 없어졌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더 이상 하루하루가 설레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예상치 못한 이벤트로 잠시 단기 여행자가 되어 바라보는 치앙마이는 다시 모든 게 새롭게 느껴졌다.


아 여기가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나도 이렇게 가게 하나, 간판 하나, 꽃 하나를 보면서 새로워하고 즐거워했었지.


끝이 없을 것 같던 치앙마이는 내 안에서 색이 조금 바랬었지만, 온전히 여행으로 온 엄마의 눈에 비친 치앙마이는 끝이 있기 때문에 굉장히 빛나 보였다. 그런 엄마와 함께 지내니 다시 치앙마이가 빛을 발하는 느낌이었다. 일상은 끝이 보일 때 더 생동감 있고 아련해졌다.


아침에 일어나 카페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따듯한 라떼 한 잔을 하는 이 평화로운 시간을, 한국에서는 같은 마음으로 누리기 힘들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방인이기 때문에 자유로웠지만 더 이상 이방인일 수 없는 한국에서는 내 마음이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고 엄마와 나의 하루도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겠지. 하지만 다시 돌아갔을 때 잠깐 동안이라도 내 일상이 다시 빛나 보일 수 있다면 그것도 이번 해외살이에서 얻은 소중한 선물일 것이다.






치앙마이의 가장 높은 곳에서 엄마와






잘 다니던 대기업에서 퇴사하고 자발적 방황기를 가치고 있는 디자이너 ‘다섯씨’ 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근근이 프리랜서 일을 하면서 치앙마이에서 두 달, 태국에 79일을 머물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지금은 포르투갈에서 살아보고 있습니다.

글쓰기에 게을러서 브런치 글은 실제보다 아주 천천히 올라옵니다. (언제쯤 브런치도 포르투갈로 올 수 있을지...!)


포트폴리오는 아주 느리게 비핸스에 업로드되고 있습니다. - www.behance.net/kimdasol

가-끔 내킬 때 그림일기도 그립니다. - www.instagram.com/o3o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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