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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Jun 30. 2016

<곡성>, <인생은 금물>, 그리고 사랑

함부로 엮어버린 비루한 인과


‘절대 현혹되지 마라’


    영화 <곡성> 포스터에 박혀 있는 문구다. 저 문장은 영화 전체에 통틀어 적용될 수 있다. 작중에서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종구(곽도원)는 현혹으로 점철된 서사 속에서 끊임없이 헤맨다.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가? 관객은 종구-주인공-착한놈으로, 그런 종구가 적대하는 쪽을 나쁜놈으로 상정한다. 주인공이 착한 것이야 그렇다 쳐도, 그래서 누가 나쁜지는 계속 헷갈린다. 이놈은 나쁘다! 생각했던 인물은 종구를 도와주는 듯도 하고, 뭔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듯도 하고, 현혹하는 듯도 하다. 여기서 딸 효진(김환희)의 일갈 ‘무엇이 중헌디?’는 ‘절대 현혹되지 마라’와 함께 영화 내내 울려퍼지는 화두다. 진짜, 무엇이 중할까?




    이 기묘한 <곡성>의 내러티브는 또 묘하게, 사랑이라 착각하는 실패한 썸에 대한 은유로도 읽힐 수 있다. 영화 초반, 살인사건과 좀비 같은 생존자들의 상태는 독버섯이 원인이다. 하지만 어쩐지 초자연적 힘이 작용하는 것도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괴담도 들려온다. 그 원인으로 종구는 외지인을 의심한다. 저놈이 저주를 날리는 거 아니야? 마찬가지로, 나는 어쩌다 그 사람과 밥을 먹는다. 시간표상 내 공강과 그 사람의 공강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자꾸 의심한다. 과연, 단순히 둘다 시간이 되어서 먹는 걸까? 왜 하필 그 때 둘다 공강이지? 마침 그 사람이 원래 이 시간에 수업을 넣었다가 취소했다는 소식도 전해듣는다. 이거 뭐지. 은근 나를 의식해서 시간표를 짰나?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그 쯤이 점심시간이긴 하다. 나는 조금 지각할 것을 감수하고 길게, 천천히, 밥을 먹는다. 적당히 이야기하던 그 사람이 다 먹었으면 가자고 말한다.


    종구는 동료인 성복과 함께 그 외지인의 집에 찾아가 본다. 그 집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알쏭달쏭함밖에 없다. 수많은 사진이 있다. 왠지 수상쩍다. 둘러보다가 그에게 들켰지만 종구는 뻔뻔히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그 집에 있었노라며 성복에게 효진의 실내화를 건네받는다. 종구는 효진에게 그 외지인에 대해 추궁하지만, 도리어 ‘뭣이 중허냐’며 욕을 듣는다. 나는 그 사람의 SNS를 정주행한다. 알듯말듯한 글들에 흔들린다. 실수로 3년전 글에 좋아요를 눌렀지만 잽싸게 다시 눌러 취소한다. 카톡하면서 나왔던 미묘한 말이나, 같은 취향, 같은 말투 등에 하나하나 끌린다. 이거 정말 그린라이트인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온 말들일 수 있다.


    영화 말미에 무명은 종구를 붙잡으며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집에 가면 안 된다고 붙잡는다. 종구는 참지 못하고 닭이 두 번 울고 나서 집으로 간다. 그리고 이미 피바다가 된 집에서 딸 효진에게 해를 입는다. 한편 이삼 부제는 외지인의 토굴로 찾아가 그의 정체를 추궁한다. ‘너는 이미 나를 악마로 보지 않느냐?’ 묻는 외지인은 정말로 악마가 된다. 친구는 내게 헷갈리지 말라고, 조금 더 타이밍을 보아 고백하라고 말하며 나를 붙잡는다. 아, 나는 참을 수 없다! 솔직히 확신은 안 들지만, 왠지 고백하면 될 것 같다. 두 번의 만남 끝에 고백을 한다. 차인다. 젠장, 그 사람이 나를 가지고 놀았다. 악마같은 사람.





    섣부른 고백 끝에 남는 것은 어색한 관계의 잔해다. 거기에는 시간이라는 무당만이 찾아와, 실패한 사랑의 결과가 어떤지를 사진 찍듯이 박제한다. 이렇게 하나의 (몸이든 마음이든) 피투성이 서사가 끝난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자. 모든 신호들은 언제나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노란불이었다. 공강에 밥을 먹었다는 사실, 그 투명한 진공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는 억지로 인과를 짜맞춘 것뿐이다. 사진을 모으는 외지인처럼 나는 그 사람이 나에게 관심있다는 증거를 수집하고 들여다보며 곱씹었다. 그 판단근거는 ‘이성이 관심있으면 보내는 5가지 신호’ 같은, 진화심리학에 바탕을 둔 얼치기 기사이기도 하고, 타로점이나 별자리 운세나 혈액형별 성격 같은, 판타지에 가까운 해석을 토대로 하기도 한다. 마치 독버섯이라는 합리적 설명과 귀신의 저주라는 오컬트적 설명 사이를 오가며 믿고 싶은 것을 취하는 종구처럼.


    효진의 실내화, 그 사람의 SNS 글은 순수한 기표이다. 비뚤어진 인과는 물질을 물증으로 만든다. 그것은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처럼 사랑의 물신이 된다. 데스데모나에게 손수건이 있었다면 오셀로의 질투가 끝났을까? 그 사람이 SNS를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면 내 전전긍긍한 추측질이 줄어들었을까? 알 수 없다. 종구가 닭이 한 번도 울기 전에 갔더라면, 혹은 세 번 다 울고 갔더라면, 그런 참극을 피할 수 있었을까? 무명은 착한가 나쁜가? 역시 알 수 없다. 서사란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다른 언젠가 고백했다면 둘의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그보다 이 친구라는 놈은 정말 믿을 수 있는 능숙한 놈이었나? 알 수 없다. 오직 알 수 있는 건 차인 후 마주하는 씁쓸하리만치 애매한 세계뿐이다.


    애초에 사랑은 인과가 아니다. 인과를 만드는 것은 논리나 이성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내 욕망이다. 그건 욕망 안에 있으면 알 수 없는 사실이다. 이쯤 하면 그 사람이 받아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사실, 이제는 좀 받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에 가깝다. 진공 속에 던져진 텅 빈 기호를 멋대로 기울여 인과를 만든 욕망은 고정된 관계, 사랑에의 강요를 추동한다. 그렇게 보면 차인 것은 그저 스스로의 욕망에 배신당한 것뿐이다. 아무도 현혹 같은건 하지 않았고, 스스로 빨려들어간 것뿐이다. 하지만 그걸 차마 인정할 수가 없으니 받아주지 않는 그 사람을 멋대로 자기를 현혹한 악마로 만든다. 그 외지인이 구멍난 손을 보여줄 때는 그래도 예수처럼 볼 여지가 있었다. 결국 악마라 믿고 싶으니 악마가 된 것뿐이다.


언젠가 우리 별이 되어 사라지겠죠

모두의 맘이 아파올걸 나는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렇게 정해져 있는걸

세상을 만든 이에겐 아무 일도 아닐 테니까


인생은 금물 함부로 태어나지는 마

먼저 나온 사람의 말이

사랑 없는 재미없는 생을 살거나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네


그대는 나의 별이 되어준다 했나요

나의 긴 하루 책임질 수 있다고 했죠

그런데 어두워져도 별은 왜 뜨지 않을까요

한번 더 말해줄래요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사랑도 금물 함부로 빠져들지는 마

먼저 해본 사람의 말이

자유 없는 재미없는 생을 살거나

죽을 만큼 괴로울지도 몰라


인생은 금물 함부로 태어나지는 마

먼저 나온 사람의 말이

사랑 없는 재미없는 생을 살거나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네


살아간다는 것은

별이 되어가는 것이라네


사랑도 금물 함부로 빠져들지는 마

그러나 너는 결국 말을 듣지 않고

어느 누군가를 향해서

별이 되어 주러 떠나게 될 걸


-언니네 이발관, <인생은 금물>

 

   이쯤에서 언니네이발관의 <인생은 금물> 가사를 곱씹어 보자. ‘사랑도 금물 함부로 빠져들지는 마, 그러나 너는 결국 말을 듣지 않고 어느 누군가를 향해서 별이 되어주러 떠나게 될걸’ 글쎄, 다른 걸 떠나서 사랑에는 왜 빠지는 걸까. 반복해서 말하듯, 알 수 없다, 사랑이라니. 억지로 인과를 만들고 스스로를 빠지게 하여 참담한 극중 아이러니 속에서 살게 만드는 것. 취향이 같아서, 목소리가 좋아서,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자주 마주쳐서, 라고, 좋아해 놓고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는 것. 기꺼이 현혹되고, 무엇이 중한지 몰라도 함부로 캐묻고 강요하고 절망하고 분노하는 것 말이다. 이쯤 되면 내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나를 빠뜨린다. 그런 살인사건을, 나약한 일개 경찰이 막을 수는 없는 것처럼.


    아니, 어디 실패한 썸만 그럴까. 사랑 자체가 부지불식간에 함부로 빠짐을 당해버리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이야말로 선택할 수 없이 나와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 앞에서 뭘 어쩌겠는가. 세상을 만든 이에겐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사건현장을 찍은 사진들 앞에서 이 거대한 ‘함부로’를 이해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뿐이다. 인생이나 사랑이나 금물이라 하지만, 애초에 선택이 가능할 때에야 금할 수 있는 것이다. ‘함부로’ 만들어진 세상 앞에서, 어떻게 그 ‘함부로’를 함부로 피할 수 있을까. 현혹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무엇이 중한지 아나. 화두가 끝나지 않는 이유는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 불확실한 ‘함부로’만이 영원하고, 우리는 오늘도 금물조차 허용되지 않은 삶과 사랑에 스스로 선택한 듯 기꺼이 뛰어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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