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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Aug 01. 2016

<다시 만난 세계>의 급진적 해석

이화여대 시위와 예술의 정치적 연대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눈을 감고 느껴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마 눈 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상처 입은 내 맘까지

시선 속에서 말은 필요 없어 멈춰져 버린 이 시간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중에서-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 여부를 두고 한창 시위가 진행중이다. 학생들은 총장과 대화하자며 본관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약속된 12시, 학생들을 빼내기 위해 1600명의 경찰이 투입되었다. 동영상 속에서 학생들은 자리를 지키며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른다. 천진난만한 이 노래는 경찰과 대치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울려퍼지며 아이러니한 상황의 대위법을 연주한다. 이 사태를 가사와 연관하여 조금 더 알아보자.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경찰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리고 총장에게 전해주고 싶다. 먼저 경찰들. 사실 그들이야 속된 말로 ‘까래서 까러 온’ 것이다. 의무경찰 복무든 실제 직장이든 그들 역시 수직적 명령의 희생자로서 진압의 ‘대상’을 마주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폭력적인 진압은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잘못이며, 무엇보다도 그들의 잘못이 ‘된다'. 어쨌거나 이 맥락의 최전선에서 몸으로 마주치는건 이들이기 때문에. 그런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당신들이 미워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을의 입장인 당신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라고. 물론 그런 얘기는 총장의 억압 및 꼭두각시놀음이라는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릴’ 것이다. 다음으로 총장이다. 근데 이건 전해준다기보다, 말 그대로 ‘대화’를 하고 싶다는 얘기일 뿐이다.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은 이제까지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몰아부친 총장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홀로 결정하고, 통보하고, 실제로 행한 후에야 들리는 목소리들을, 이제는 그 과정 전에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같은 가사는 다른 청자에 따라 다른 시간적 인과를 가진다.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느껴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도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정치적 입장을 가질 수 없이 여러 진압에 동원되는 경찰은 기계로서의 삶을 수행한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있는데, 그들도 인간이다. 눈 앞의 진압 ‘대상’들은 명령과 연계되어 너무나 자주 그리고 쉽게 인간이라는 자각을 막아버린다. 진리는 은폐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급진적이고 과감한 행동이다. 가시성을 포기하는 순간,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움직이고 싶은지가 보일 것이다. 그 움직이는 마음을 기다리며 그들을 향하는 눈빛을 알아달라고 학생들은 노래한다. 총장은, 다른 거 없다. 양심에 손을 얹고 빨리 대화하러 와 달라는 얘기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마.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역시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먼저 총장에게 말하는 상황이다. 총장이 원하는 특별한 기적은 자명하다. 논의 없이 이루어지는 투명한 일방적 소통의 세계, 각광받는 창의융합과 미래라이프, 그리고 자본과 결탁하여 한층 더 탄탄해지는 대학사업의 미래. 그런거 기다리지 마라, 어차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미래라는 벽이다, 라고 학생들은 말한다. 동시에 이 가사는 학생들이 스스로들을 격려하며 부르는 노래다. 이제까지의 소통이 일관되게 아쉬웠던 총장이 이번에 갑자기 고분고분해질 리가 없다. 어쩌면 소통하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는 것에 가깝다. 오히려 눈 앞에 선 이들의 거친 길에는, 본관 복도에서 그 수를 알 수도 없는 1600명 경찰의 벽이다. 하지만, 바꾸지 않아야 하는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학우들아, 총장님아,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상처 입은 내 맘까지’ 변치 않았고, 변치 않아야 할 것은 이화여자대학교의 가치이다. ‘모든 여성의 학문의 공평한 향유’를 실현하며 ‘여성학의 산실’인 이화여자대학교의 정체성 말이다. 인간으로서 존중받는다는 가치, 성 평등 앞에서 ‘여성특화형 배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건강, 영양, 패션 등등과 ‘여성’을 결부하려는 일을 총장이 앞장서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가사는 호소다. 긴 시간 동안 이화여자대학교가 지켜온 그 가치를 기억하고 지켜 달라. 그럼으로써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까지 회복하여 달라. 그리고 학생들은 다시 이 상황 속으로 들어온다.

얼굴은 외친다. 그 외침 속에 초월과 신비가 있다.

    ‘시선 속에서 말은 필요없어 멈춰져 버린 이 시간’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이다. 시선은 얼굴을 본다. 무한한 신비로서의 타자는 ‘얼굴’로 다가온다. 이 낯선 들어옴은 어떠한 폭력진압보다도 불가항력적이다. 무엇보다도 얼굴은 끊임없이 외치며, 책임과 섬김을 요청한다. 얼핏 두려운 이 상황은, 그러나 ‘멈춰져 버린 이 시간’, 즉 정태적 시간을 뚫고, 동시에 자아의 닫힘을 뚫고 초월로서 떠오른다. 자본과 체제, 명령으로만 이루어져 인간성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얼굴들이 만났다. 그들이 눈만 마주치고 있더라도 그런 식의 끌어내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타자의 얼굴 속에 낯선 신비, 그리움, 윤리, 책임, 그리고 시간의 열림이 있다. 그것이 동시에 자아의 초월 및 신과의 조우를 가능케 한다. 이 가사는 그런 초월로의 손짓이다. 그 마주함이 잘 이루어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물론 이 사랑은 에로스적 의미의 사랑은 아니다. 이 느낌 이대로 사랑하겠다는 것은 amor fati, 결국 이렇게 되어버린 운명에 대한 초인적 수용이다.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에서 경찰이 왔지만, 이런 운명도 ‘이 느낌 이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그러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순순히 이 억압적인 공권력에 잡혀가고 미래라이프의 신설에 찬성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운명을 받아들인 후에야 인간적인 상태가 된다. 그렇게 그간 반복된 불통으로 인한 슬픔에 기꺼이 작별을 고하고 거대한 체제에 저항을 시작하는 것이다.


희미한 빛을 쫓아가는 것. 인문학이 해왔으며, 해야 할 일이다.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루카치의 말처럼 그런 시대는 행복했겠지만, 이제는 온갖 빛을 땅으로 끌어온지라 별이 보이지 않는다. 저 별은 갈 수도 없으며, 다행히 가야만 한다는 압박도 없다. 오히려 미래라이프처럼, 일시적 판단에 의해 미래의 취업시장을 전망하고 미리 순종하려는 태도야말로, 사실은 위성인 별이라도 일단 가리키며 그것을 따라가라고 내모는 행위이다. 사실상 인문학이란 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알 수 없으며 심지어는 길도 아닌 곳에서, 별과 별 사이 빛이 들지 않는 그늘을 밝혀온 작업이다.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이 가사는 그 자체로 인문과학대학 학생회의 선언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언제까지라도’ 이 투쟁을 ‘함께’ 할 것이다. 자신들을 얽매는 모든 왜곡된 권위와 권세와 공권력과, 단단하기 그지없는 이 세상에 대고,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탈정황적인 노래는 정황의 옷을 입고 한없이 급진적으로 변한다. 급진적이라서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긴장된 상황 속 뜬금없음으로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요소는 동시에 비극의 요소가 된다. 희비극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가운데 견고한 체계가 흔들리고 진리가 언뜻 스친다. 세상발랄한 이 싸움의 현장에서, 왠지 그 진리를 본 것도 같다.


    결국 맞이할 학생들의 ‘다시 만난 나의 세계’에서, 그들이 진정으로 웃기를 바란다.


    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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