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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Jul 27. 2016

동요 <상어 가족>에 가려진 이야기

'뚜루루 뚜루'의 폭력성 해체하기



    핑크퐁이라는 인기 동요, 동화 포털이 있다. 여기서 제공하는 동물동요 콘텐츠 중 <상어 가족>은 굉장히 흥겹다. 노래는 아기 상어, 엄마 상어, 아빠 상어, 할머니 상어, 할아버지 상어 순으로 하여 상어 가족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특히 소개 중간중간에 어김없이 삽입되는 ‘뚜루루 뚜루’의 간단하고도 중독적인 후렴구가 단숨에 흡인력을 갖추고 청자를 끌어들인다. 말하자면 ‘○○상어-뚜루루 뚜루-△△한-뚜루루 뚜루-바닷속-뚜루루 뚜루-○○상어’의 구조가 반복된다. 여기서 ‘~~상어-뚜루루 뚜루'의 단위는 정확히 같은 멜로디로 되어 있지만, 오직 마지막 ‘○○상어’에서 ‘상어’ 가사 음만이 다르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AAAA’ 의 반복되는 패턴을 보인다 할 수 있겠다. 가사에서도 차이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상어 △△한 바닷속 ○○상어’에서 ○○은 가족 역할, △△은 거기에 걸맞는 특징을 나타낼 뿐이다.


상어 가족 뚜루루 뚜루 

    첫 번째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 상어 가족은 남성성/여성성이라는 철저한 젠더롤 및 가족 이데올로기에 기반한다. 상어 가족의 색깔을 보자. 아빠 상어는 파란색, 엄마 상어는 핑크색이다. 할아버지 상어는 연두색, 할머니 상어는 자몽색으로 그 특유의 색 대비가 옅어지는데, 이는 각자 성 호르몬의 감소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아기 상어는 젠더의 구분을 나누기 힘든 노란색으로 나타난다. 다음으로 각각의 상어에게 붙는 수식어를 보자. 각각 귀여운 아기 상어, 어여쁜 엄마 상어, 힘이 센 아빠 상어, 자상한 할머니 상어, 멋있는 할아버지 상어다. 차이가 보이는가? ‘어여쁘’거나 ‘자상한’ 여성-엄마, 할머니-상어, ‘힘이 세’거나 ‘멋있는’ 남성-아빠, 할아버지-상어. 이건 너무 명백해서 더 언급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것보다 교묘한 것은 아기 상어다. ‘귀여운’ ‘아기’는 부정할 수 없이 연관성을 가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나이주의 이데올로기는 ‘귀여운(어린)’ ‘아기’ 상어라는 상투적 인식을 재생산한다. 동시에, 그렇게 굳건한 젠더롤 가운데서도 어린 상어는 젠더가 모호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이 걸리려는 찰나 ‘우리는 바다의 사냥꾼 상어 가족!’ 가사를 통해 이 모든 것들은 가족 이데올로기로 묶인다.


    이제 두 번째 문제다. ‘상어 가족!’ 직후에 템포는 급물살을 타고 화자가 바뀐다. 주인공이 상어 가족인 줄 알았던 우리는 돌연 당황한다. 가족이라는 기의를 가지고 있던 기표 ‘상어’의 은유는 순식간에 이름도 없는 ‘물고기들’로 전치(환유)된다. 이제 이 기표에는 새로운 기의인 공포가 들어선다. ‘상어다 도망쳐 도망쳐 숨자! 으악!’ 이 급박한 도망자 서사는 갑자기 시작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영상의 맨 처음, 노래는 <죠스>의 주제곡과 함께 평온히 지내던 물고기들 앞에 아기 상어가 나타나 섬뜩한 미소를 짓는 데서 시작한다. 아기 상어 소개 직후 암초가 하나 지나가니 엄마 상어가 나오지만, 쫓기는 물고기는 어째선지 보이지 않는다. 이 물고기들은 억압된 것이다. 이 억압은 상어 가족의 소개가 끝난 직후부터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주체로서의 ‘상어’라는 진술은 가족을 모두 소개하면서 고정된 기표로서의 힘을 잃고 곧 타자를 지칭하는 ‘상어다’로 전치되어 분열을 겪는다. 그것은 틈새에 깃든 억압이 귀환하며 외치는 공포로서, 창의적 사고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단순한 ‘도망쳐’의 반복, 그리고 ‘숨자! 으악!’이라는 단말마로 이어진다.


섬뜩하지 않은가? 웃는 상어와 물고기들의 비명. 

    그러니까 이 노래는 평온한 가족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상어 가족 아래 박해받는 피해자의 진술을 기꺼이 드러낸다. 물고기들은 숨는 데에 성공하고, 이들은 다시금 구멍 뚫린 바위 안에서 노래를 부른다. ‘살았다 살았다 오늘도 살았다’ 이 노래의 특징인 AAAA’ 구조 속에서 ‘살았다’만을 세 번 말하게 하며, 나머지 하나도 오늘’도’라는 한정적 용법에 쓰인다는 점은 물고기들이 겪는 일상적 폭력을 보여준다. 사실상 그들은 매번 ‘오늘도’ 살아남는다.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직후에 세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기껏 숨어 살아남은 물고기들은 돌연 구멍 밖으로 기어나와 ‘신난다 신난다’하며 춤을 춘다. 그런 그들의 뒤로는 상어 가족이 포크를 들고 호시탐탐 노려본다. 아무리 봐도 이 안일한 위기는 물고기들의 짧은 생각으로 나타난다. 노래는 이렇게 피해자에게 잘못이 있다고 암시한다. ‘노래 끝’ 이후에 이어지는 “오예!”는 살아남았다는 서사로 마친 물고기들의 감탄사이면서 동시에 상어가족의 환호성을 뜻한다. 실제로 당황한 물고기들과 다시 섬뜩하게 웃어제끼는 상어들로 노래는 끝난다.


    크게 보아 노래는 앞의 상어 가족 이야기, 뒤의 물고기 도망 이야기로 나뉘어진다. 비슷한 분량을 할애한다는 점에서 얼핏 공평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억압된 목소리를 단지 길이상으로 절반만 허락하는 것은 오히려 기계적 중립에 가까운 태도다. 무엇보다 가장 큰 네 번째 문제는, 이 모든 박해의 역사가 ‘뚜루루 뚜루’라는 흥겨운 반복적 후렴에 묶여 제시된다는 점이다. ‘뚜루루 뚜루’는 무성 파열음 ㄸ에서 유음 ㄹ로 이어지는 매끄러운 전개, 그리고 통일된 ㅜ모음으로 안정감을 구축할 뿐,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말이다. 철저하게 정치적인 나머지 텍스트 가운데, 정확히 그만큼의 분량을 차지하는 이 가사는 이토록 탈맥락적이고 탈정치적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 후렴구는 역설적으로 더없이 정치적인 탈정치성을 가진다. 모든 진지함과 심각성은 ‘뚜루루 뚜루’ 속에 포섭되어 은폐된다.


    무엇보다 제목이 ‘쫓기는 물고기들’, ‘오늘도 살았다’ 등이 아닌 ‘상어 가족’으로 제사된다는 점은 이 노래가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앞서 피해자의 진술을 기꺼이 드러낸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왜 그랬는가’이다. 물고기들의 도망 서사는 단순히 상어 가족과, 그들을 지켜보는 시청자의 유희를 위한 것이다. 물고기들이 숨었을 때 빼고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는 상어가족과, ‘신난다’ 하며 넋놓고 춤출 때를 빼고는 불안해하는 물고기들의 표정을 비교해 보자. 그런 일상 가운데, 물고기들은 ‘오늘도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맨 마지막 “오예!”를 보면 딱히 그런지도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오늘 살아남았다고 해서 내일도 ‘오늘도’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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