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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Jul 22. 2016

결을 거슬러 디즈니 읽기

'마법사의 제자'와 공포영화, 그리고 탈식민 서사

본 글이 다루려는 영상인 <판타지아> 중 '마법사의 제자'

 

   디즈니의 <판타지아>는 몇 가지 클래식 음악에 어울리는 영상을 입힌 삽화 형식의 영화다. 그 중에서 ‘마법사의 제자’는 폴 뒤카 작 동명의 곡을 기반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다. 내용은 이렇다. 미키마우스는 마법사의 집안일을 돕는 제자다. 그는 마법사가 모자를 통해 마법을 쓰는 걸 알게 되고, 마법사가 자러 가자 그 모자를 몰래 써서 자신도 마법을 부린다. 빗자루에 팔을 생겨나게 하여 자기가 하던 물 긷는 일을 시킨 미키는 만족감에 차 잠시 잠에 든다. 깨고 보니 멈추지 않고 반복된 물 긷기로 이미 집이 물바다가 되어 있다. 미키는 빗자루를 말려도 듣지 않자 도끼를 들어 빗자루를 조각낸다. 안심한 줄 알았지만 조각난 빗자루들이 모두 살아나 각자의 빗자루가 되어 단체로 물을 퍼붓는다. 주체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가운데 깨어난 마법사가 몇 번의 손짓만으로 물과 빗자루들을 흩는다. 미키는 마법사의 눈치를 보며 모자를 되돌려주고는 자기 물바구니를 들고 도망간다.


모자만 있다면!




    단순히 생각하면 말썽꾸러기 제자의 과욕이 부른 해프닝 정도로 끝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영상은 재현의 정치학과 관련하여 중요한 쟁점을 제시한다. 먼저 직관적으로 생각해 보자. ‘이 영상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당연히 미키, 라고 여겨질 법하다. 우선 그가 가장 많이 나오고, 이야기도 그를 중심으로 진행되며, 무엇보다도 디즈니 하면 미키니까. 그런 미키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법도 안 가르쳐주면서 집안일로만 부려먹는 마법사의 착취도 악하고, 그를 빠뜨려 죽이려 하는 빗자루(들)의 린치도 악하다. 언제나 중간에 끼인 샌드위치 토핑 역할이 가장 괴롭지. 다만 일하지 않고 이익을 얻으려는 불로소득에 대한 경계와, 남의 것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며,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황금률 메시지 등의 교훈을, 우리는 이 새끼쥐의 어린 행동에서 얻을 수 있다.


    이제 관점을 마법사로 옮겨 보자. 영상에서 그는 시작과 끝에 나온다. 맨 처음 나비인지 박쥐인지 알 수도 없고 실체도 없는 뭔가를 보여줌으로써 미키에게 괜한 욕망을 심어준다. 그래놓고는 뜬금없이 자러 간다. 영상의 말미에 다시 등장한 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일처리에 이어 미키로 하여금 확실한 권력의 상하관계를 가르쳐 준다. 그가 영상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는 잃을 것이 없으며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속된 말로 세계관 최강자이다. 이런 인물에게서는 갈등이 나올 수가 없다. 앞서 미키에게서 얻었던 교훈들은 사실 그에게도 해당된다. 그는 노동조건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집을 꾸려나가는 일을 하지 않고 미키를 부린다. 남의 것을 건드리지 말 필요는 없는데, 이는 모든 것이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역시 미키를 시킨다. 하지만 이런 모든 요소로부터 비난받지 않는 것은, 그가 너무나 선명하게 강자이기 때문이며, 또한 미키를 둘러싼 사건의 발단과 결말을 장식하는 투명한 액자로서 재현되기 때문이다. 오직 그 고약한 표정만으로 엄한 스승의 이미지를 약간 입을 뿐이다. 무엇보다 비난의 대상은 따로 있다.


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언제나 혐오는 아래를 향한다. 이 경우에는 빗자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빗자루로 재현된 익명의 노동주체다. 빗자루의 입장으로 들어가 보자. 미키에게 정해진 과업이 있듯이 빗자루 역시 필요할 때에만 소환될 것이고, 집안일도 매일 비슷할테니 그 시간은 다소 정해져 있을 것이다. 지금 빗자루는 근무 외 시간일텐데 돌연 마법에 이끌려 팔이 생기고 물바구니를 든다. 바닥에 닿아 있기는 하지만 본래 쓸어내는 용도와 다르게 솔을 두 갈래로 갈라 걸어야만 한다. 자신의 일도 아닌 미키의 일을 대신 해야 한다. 영락없이 주말에 카톡으로 업무 지시를 받고 상사의 보고서를 대신 써주는 인턴, 신입사원의 모습이다. 아니, 아니다. 단순히 화이트칼라로 볼 수는 없다. 빗자루는 볼트를 너무 조이다 신경쇠약에 걸린 찰리 채플린처럼 강박적으로 자신의 과업만을 수행한다. 그것이 자신과 윗사람 모두를 곤경에 빠뜨린다는 자각도 없이 말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빗자루에게 팔이 생겨난다는 서사이다. 이는 사실상 그에게 필요한 것은 바구니를 들 두 팔과 걸을 수 있는 두 갈래 솔이 전부라는 것을 시사한다. 노동을 위한 부분 이외의 모든 기관들은 생략되고 길쭉한 막대기로서 압축된다. 그저 미키의 행동을 모방만 하면 된다. 우리는 이 빗자루에게서 전지구적 규모의 세계화, 군사화된 자본주의 경제구조로 인한 착취의 희생자를 읽어낼 수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에서 프롤레타리아를 가리키는 은어로서 ‘서발턴(subaltern)’을 사용했다. 본래 하급 장교를 나타내는 이 의미는 그러나 나중에 탈식민 연구자들에 의해 그 의미가 바뀐다. 이제 서발턴은 고정된 의미가 아니며, 각 사회/공동체에서 인종, 계급, 성별 등의 구도 중 어느 쪽으로든 하위 주체일 수밖에 없는 이들을 뜻한다. 서발턴은 자신의 목소리가 없으며, 그러므로 물론 정치적 영향력도 없다. 색상으로 보나 일의 종류로 보나 이 빗자루는 제 3세계 출신 여성 저임금 공장 노동자를 뜻한다. 즉 완벽한 서발턴이다.


사실상 빗자루에게 필요한 것은 바구니를 들 두 팔과 걸을 수 있는 두 갈래 솔이 전부다.


    이제 우리는 이 영상에 담긴 억압의 구조를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백인 부르주아 마법사-백인 프롤레타리아 미키-황인 프롤레타리아 여성 말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빗자루에 생명이 불어넣어진 것이 아니라, 역으로 서발턴 여성이 빗자루로서, 즉 노동기계로서 재현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구조로 보아, 마법사의 모자는 실제로 마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마법같은 증기기관 및 방직기구로 대표되는 생산수단을 나타낸다. 빗자루를 일하게 하고 미키가 꾸는 꿈은 부르주아, 즉 손위 계층의 욕망을 모방하는 무의식의 발현이다. 도끼로 빗자루를 난도질하는 미키는 서발턴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억압 및 혐오의 대표성을 나타낸다. 이후 여럿으로 증식된 빗자루’들’은 사실 서발턴이 단일한 주체가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빗자루들로서 환원되어 재현된다. 그저 자기 일을 열심히 할 뿐인 서발턴은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리는 괴물이 된다. 이는 미키가 마법을 시험함으로써 이상을 투사하는 대상으로, 동시에 그를 위기에 빠뜨리는 위험한 존재로, 즉 ‘성녀(현모양처)/창녀(팜므파탈)’로 나뉘어진 약자에 대한 혐오의 이분법을 나타낸다.


 

    사실 ‘마법사의 제자’는 공포영화 서사로도 읽을 수 있다. 공포란 결국 낯설음-타자에 관한 것이다. 이 낯설음이란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억압된 가치들이 귀환한 결과로서 나타난다. 짧게 세 가지 코드를 짚어 보자. 먼저 ‘마법사의 제자’는 하우스 호러다. 부르주아의 생활을 욕망하는 프롤레타리아는 빚과 융자로 무리하게 부르주아의 집을 모방하여 마련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 집은 낙원이 아니고, 빚을 값기 위해 평생을 이사도 못 가고 워커홀릭으로 살아야 한다. 그쯤 되면 집이 괴물로 느껴진다. 이것은 영화에서 헌티드 하우스, 즉 집 안의 귀신으로 형상화된다.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 미키는 부르주아 마법사의 욕망을 모방한다. 그런 미키에게는 집 안의 도구가 괴물로서 다가온다. 두 번째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모티브다. 과학은 인류를 풍요롭게도, 황폐하게도 만든다. 말하자면 매혹과 불안의 양가성을 가진다. 그 중에서 황폐화의 가능성, 즉 불안은 핵전쟁의 공포처럼 언제나 인간을 놓아주지 않는다. 이처럼 성찰 없이 호기심에 모자를 쓴 미키는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른다. 세 번째는 좀비 모티브다. 죽음과 삶의 사이에 모호하게 걸쳐 있는 존재는 우리의 인식 바깥에 머물러 우리에게 공포를 준다. 조각난 빗자루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 자아도 없이 움직이는 모습은 일견 공포스럽다. 특히나 미키를 주인공으로 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좀비가 무섭듯이, 죽지 않는 물질성은 그 자체로 공포스럽다.




    하지만 그런 공포도 결국은 마법사의 손짓 몇 번에 해소되고 만다. 그는 이 공간의 지배자인 동시에 모든 역학관계에서 최상의 위치를 점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주-마름-소작농의 관계로도 볼 수 있다. 소작농이 아무리 마름을 처패도 자주가 소작농을 자르면 끝이다. 소작농은 결코 지주에게 닿을 수 없다. 사실상 대다수의 마름들은 지주가 아닌 소작농에게 화를 내는 강약약강의 태도를 취해버린다. 다시 말하지만 혐오는 언제나 아래를 향한다. 여튼 결국 미키는 빗자루를 마법사에게 뺏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빗자루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과연 재현은 서발턴의 개별적 존재들과 그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가? 서양-부르주아-백인-이성애자-자본주의자-남성인 디즈니가 재현했는데 퍽이나 그렇겠다.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이자 맑시스트이고 해체주의자인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 형식의 논문을 통해 오히려 서발턴이 말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리 지식인이 그들의 언어를 재현한다 해도, 학문과 인식소적 폭력을 거쳐 재현된 그 목소리는 서발턴의 목소리와 다를 것이라 말한다. 물론 서발턴은 벙어리가 아니다. 분명 빗자루는, 아니 황인 여성 노동자는 말을 했을 것이다. 미키가 불러내었을 때, 그리고 마법사가 미키로부터 그녀를 빼앗을 때 무엇이든 외쳤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외침이, 목소리가, 우리에게 들리지 않았다는 것. 즉 말의 실패이다. 스피박은 우리가 함부로 서발턴의 목소리를 재현하노라 말할 때에 거기에 대고 끊임없이 부단한 물음과 관심을 촉구한다. 우리는 결국 그들을 개별적으로 완전히 재현할 수 없을 거라고. 그래도 재현하기를 멈추지는 말아 달라고. 빗자루 속에, 빗자루의 세세한 결처럼 숨어 있는 억압의 흔적들과 존재들을 읽어내어 달라고 말이다. 빗자루의 소리가 들리는가? 쓰윽-쓰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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