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의 <Milky Way>와 존 던의 <고별사>, 과학과 문학의 접점
별은 별로부터 멀다. '별들 사이의 평균 거리는 100만 킬로미터의 3000만 배나 된다.’ 그 머나먼 별들이 무수히 모여 은하를 이룬다. '우리 은하계는 대략 1000억에서 4000억 개에 이르는 별로 되어 있다고 짐작된다.' 이 우주는 그런 은하가 또다시 무수히 모여 있다. ‘우리의 은하는 1400억 개 정도일 것으로 짐작되는 은하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그런 우주의 거대함을 가늠할 수조차 없다. 정밀한 망원경이 있어도 상상하기 쉽지 않으며, 이렇게 숫자로 나타내도 쉬이 와닿지 않는다. 우리는 돈도 억단위로 만져본 적도 별로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은하니 우주니 주워섬기는 것조차도 어마어마하게 함부로 하는 소리다. 정말이지 인간은 얼마나 작은가. 이런 우주는 주사위놀이로 움직이는 걸까, 아니면 그렇지 않을까? 우주는 우연으로 움직일까, 아니면 결국 어떤 인과를 가지고 있을까?
보아의 <Milky Way>는 이 거대한 우주에 맞대어 사랑을 노래한다. 화자의 상황을 살펴보자. ‘지나버린 시간 함께할 순 없어도’, ‘다시 가고싶어 세상을 모르던 시절’, ‘넌 기다렸지/내게 속삭이던 너만의 비밀의 약속’ 등의 가사에서 우리는 화자가 과거 ‘너’와 함께했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떤 마음으로 전할까’, ‘이젠 너에게 줄 내가 가진 수많은 날들’, ‘이젠 내게로 올 세상에 비친 나의 모습’, 그리고 ‘너를 기다리고 있어’ 등의 가사에서 ‘너'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화자를 볼 수 있다. 전체 가사 속에서 이런 현재 시제와 과거 시제, 그리고 (의지를 담은) 미래 시제는 여러 번에 걸쳐 혼재되어 있다. 언뜻 보면 그냥 철없는 꽃천지가 못 잊어서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가사가 Milky Way, 즉 은하와 연결되면서 모든 가사는 다른 맥락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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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거기에 있는 것과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다르다. 밤 하늘의 별들은 이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보는 별은 적어도 빛이 몇 시간~며칠~몇 년 혹은 몇 세기를 날아 우리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100년 전에 사라져버린 별의 200년 전 모습을 오늘 보는 것일 수도 있다. 하물며 별들의 점묘법으로 수놓아진 은하는 어떨까. 은하를 보는 현재의 화자는 그 자체로 수많은 과거들을 마주한다. 소중함을 잃어버리기 전, 어른 이전의 단계와 ‘너’와 함께 하던 시간들, 이후 ‘너’를 그린 설레임과 함께 기다려온 모든 순간까지. 은하를 보는 것은 시원으로부터 이어진 모든 의미들을 복기하는 과정이다. 화자는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지는 기억 작업들을 통해 현재 및 과거와 더불어 춤을 추는 것이다.
화자는 '까만 밤 내 안에 펼쳐진 세계로 꿈이 반짝이는' 가운데, '문득 가까워진 계절을 여기 불러와'서는, '언제나 만날 수 있었던 곳에서 너를 기다린다'. 그러면서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줘', '나를 놓치지 말아줘' 라고 말하는데, 정황상 ‘너’가 현재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내 곁에 있어달라는 화자의 부탁은 일견 모순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우주적 은유 아래서는 모든 것이 해석된다.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언제나 내 곁에 있어달라는 부탁이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도치법인데, 바로 뒤에 나오는 ‘나를 놓치지 말아줘’가 포인트다. 화자의 의지적 기다림은 자기가 여기에서 계절이 몇 바퀴를 돌든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제라도 와달라는 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별처럼 흐르고 있을 테니 ‘너’가 놓치지 말아 달라는 역설적 화법으로서 간절함을 드러낸다. 그렇게 자신을 놓치지 말고, 무사히 만난 후에는,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달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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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별로부터 멀다지만, 존재는 존재로부터 더욱 멀다. 어떤 언어로도 붙잡을 수 없고, 그저 모방/재현/인용할 수밖에 없는 비존재가 나-타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같은 자리, 같은 시간, 비밀의 약속이라는 착각에도 불구하고 결국 본질적 분리는 피할 수 없다. 번역론에서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번역어와 원어의 차이로 발생하는 ‘번역 불가능성’이다. 원어와 번역어 사이에 위계를 두는 근대적, 식민주의적 번역론과, 두 언어의 수평적 차이로 인한 혼종성에서 창발적 틈새가 드러난다고 보는 탈근대적, 탈식민적 번역론은 결국 이 '번역 불가능성'을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사실 다른 언어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언제나 번역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번역에는 언제나 번역 불가능성이 자리하지 않은가. 어마어마하게 떨어져 있는 별들의 거리는 차라리 번역할 필요가 없다. 투명한 과학의 언어가 닿지 않는 존재의 틈새에는 더욱 깊은 진공의 어둠이 자리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분리된 ‘너’를 다시 기다린다는 화자는 정말이지 뭐랄까. 순진해빠졌다.
그리고 그 순진함은 또 다시 초월적 표현을 부른다. 우연한 사랑을 찾았던 나를 (‘너’가) 지켜보고 있었다니, 없는데 어떻게 지켜봐? 하지만 일견 허언증같은 이 가사는, 이 우주의 화두인 우연과 운명의 대립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화자는 우주의 거대함과 자신의 작음, 존재와 존재의 거리를 고려하건대 ‘너’를 다시 만날 것이 운명이라고 차마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연한’ 사랑이라고 표현하지만, 이미 여기서의 우연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그런 자신을 (‘너’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근거 없는 믿음에서 더욱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이 두 가사의 앞에는 꼭 ‘I believe’가 붙는다. 우연에 닿을 정도로 불가능한 가능성을 극복하려는 화자의 의지는 이렇게 우연같은 필연을 바람으로써 우주의 원리를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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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영국 시인 존 던의 시 <고별사: 애도를 금함>을 떠올려 본다.
(……)
Our two souls therefore, which are one,
Though I must go, endure not yet
A breach, but an expansion,
Like gold to aery thinness beat.
If they be two, they are two so
As stiff twin compasses are two ;
Thy soul, the fix'd foot, makes no show
To move, but doth, if th' other do.
And though it in the centre sit,
Yet, when the other far doth roam,
It leans, and hearkens after it,
And grows erect, as that comes home.
Such wilt thou be to me, who must,
Like th' other foot, obliquely run ;
Thy firmness makes my circle just,
And makes me end where I begun.
(……)
그러니 우리 두 영혼은 하나일진대
비록 나는 떠나야 하나 그것은
단절이 아닌 확장에 불과하오.
두드려 얇게 펼친 금박처럼.
우리의 영혼이 둘이라 한다면
컴퍼스의 단단한 두 다리와 같소.
한쪽을 지키는 그대의 영혼이 가만히 있어도
나머지 한 쪽이 움직이는 순간 함께할 거요.
그대가 중심에 머물다가도
다른 한 쪽이 배회한다면
함께 기울여 귀를 기울이고
다시 돌아올 때에 꼿꼿이 설 테요.
그대와 나의 모습은 이러하니
비스듬히 나아가는 다리와 나머지 하나
그대의 확고함이 우리의 원을 반듯이 하고
시작한 그 곳에서 끝낼 수 있게 할 테요.
-John Donne, <Valediction: Forbidding Mourning> 뒷부분
이미 과거 어느 날로부터 화자와 ‘너’는 컴퍼스의 두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고 화자는 상정한다. 그러니까 사실상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줘 나를 놓치지 말아줘’라는 부탁도, ‘너는 지켜보고 있었지’라는 허언증스러운 진술도, 화자와 ‘너’ 사이에 놓인 거대한 컴퍼스적 관계로 본다면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화자에게 신이 주사위놀이를 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13세기 성경책의 그림처럼, 7세기 복희여와도처럼, 윌리엄 블레이크의 ‘태고의 나날’처럼, 자신과 ‘너’를 두 축으로 묶어둔 불변의 컴퍼스가 있다는 철썩같은 믿음이다. 이쯤 되면 최소 그렌라간 이상의 초월적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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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초월적 의지는 무엇에 대한 초월인가? 결국 ‘너’와 함께했던 시간은 저 먼 별처럼 과거 속에 있다. ‘너’는 과거 어느 순간에서부터 지금까지 없어 왔다. 심지어는 앞으로 올 것인지, 과연 화자를 놓치지 않을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계절이 아니라 은하가 한 바퀴를 돈다고 한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을 수 있을까? 우주는 여전히 팽창하고 있고,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 Einmal ist kenimal. 쿤데라의 말처럼 회귀할 수 없는 인간의 존재는 서글프도록 가벼울 뿐이다. 결국 사라질 별과 은하, 보다도 일찍 스러질 존재적 한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복잡한 세상 속에 갇힌 채 손이 닿지 않는 두려움.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본질이다.
'하지만 계속 가도 되겠지, 새로운 나날의 시작으로'. 화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다린다. 이 기다림은 누구를, 왜, 언제까지 기다리는 줄도 모르면서 부조리 가운데 무작정 고도를 기다리는 고고, 디디와 다르다. 이것은 끝없이 새로운 의지적 다짐이다. '그렇게 흘러가지 On the milky way'. 어쩌면 흘러간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그럼에도 흘러감은 순환일 것이다. 76년마다 돌아오는 헬리 혜성, 아니 그것보다 더 큰 규모로 돌고 도는 은하의 움직임들 속에서, 어쩌면 한 번, 겹치는 순간이 올 것이다. 화자는 불가능에 가까운 믿음으로 기꺼이 그 새로운 나날을 끌어안기로 선택한다. 과학은 이 지점에서 문학적 상상력과 만난다. 과학의 엄밀한 객관성이 불가능성을 천명하면 할수록 이 은유의 농도는 진해진다. 시간이, 별들이 흐르는 이상 ‘너’라는 기의는 끝없이 이어지고, 그만큼 화자의 기다림도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까만 밤, 화자의 세계 안에서 꿈은 반짝인다. 어디론가, 언제까지나.
참고문헌: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