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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Jul 19. 2016

공, 자유와 억압, 그리고 공가능성

바디우적 사건을 한스푼 얹은 개소리

    뜬금없겠지만 한 번 공을 발음해보자. ㄱ 이전에는 혀 뒤쪽과 물렁한 입천장인 연구개가 댐의 수문처럼 닫혀 있다. ㄱ을 발음하는 짧은 순간 어떠한 공기의 떨림으로도 방해받지 않는 자유의 바람소리가 들린다. 그 ㅎ소리는 이제껏 닫혀 있었던 데에 대한 반동으로 말미암아 조금 거세다. 그러나 그 자유도 잠시, 짧은 축제가 끝나고 더 이상 공기를 내보내지 않는 침묵의 순간이 온다. ㅇ받침은 그 때를 기다려 살그머니 혀와 연구개를 다시 닫는다. 대신 비강을 통하는, 조금 더 먼 길을 열어둔다. 억압, 과도한 자유, 그 자유에 대한 염증, 이 때를 틈탄 억압의 재-개입, 그리고 이전보다 불편해진 ‘타협된’ 자유. 자유와 억압은 이렇게 교묘하게 돌고 돈다. 우로보로스를 닮은 ㅇ처럼.


    그런 공(空)이 한자로 ‘비어 있음’을 의미한다니 역설적이다. 비어 있음은 열려 있음을 의미하지 않던가. 하지만 앞서 봤듯이 비어 있다는 ‘공’자는 그 발음에서부터 의뭉스러운 순환을 거친다. 열림은 닫힘을 전제하고 닫힘은 열림을 전제한다. ‘과도한 자유’라는, 언뜻 보기에 형용모순같은 표현은 이 지점에서 가능해진다. 억압에 대한 반동으로 자유를 향유하는 자는 도리어 그 자유에 묶인다. ‘자유로워지세요!’ 자유를 부드럽게 강요하는 문장은 그 자체로 넓은 그물이 되어 자유를 가로막는다. 그렇게 억압자가 허용하듯 권유하는 자유는 언어의 선점으로서 나타난다. 이미 자유의 의미는 오염되어 있다. 그 오염된 자유를 누리는 피억압자들은 이내 권태에 빠진다. 낭만화된 자유를 무지개처럼 붙잡으려다 실패한 이들은 ‘이런건 자유가 아니다’가 아니라 ‘자유는 나쁘다’라고 생각한다. 모나지 않은 얼굴의 억압자는 이 때 슬그머니 다가와 피억압자와 자연스럽게 억압 및 자유를 타협한다.


자유와 억압의 우로보로스 구조.

    공이 담고 있는 양가성은 여러 공에 적용된다. 일정 계급에 따라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가하며 연봉을 나누고, 자본가의 생산 수단 아래 타협적인 벌이만을 인정하는 공(工), 젊은이의 창의력과 열정으로 마음껏 꿈을 펼치게 해 기꺼이 저작권을 가져오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아이디어를 팔게 해 조금 비싼 용돈을 쥐어주는 공모전의 공로(功), 국가를 떠나서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 아래 보호와 자유를 교환하는 공적 장치들(公), 선을 그어놓은 넓은 운동장과 정해진 규칙 아래에서 자유로이 뛰놀게 하는 공놀이(?), 심지어 ‘공’에서 가장 교묘한 부분인 ㅇ받침 모양의 ‘원’을 함께 이어붙여 ‘도심 속의 자연’을 표방하는 ‘공원’까지(??). 사실상 억압자는 낭만화와 이상화를 일삼아 자유를 한껏 왜곡한다. 억압 속 자유야말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 혹은 차악이라는 듯이.



    이쯤에서 우리는 돌연 공공칠빵 게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의 두 글자인 공공은 각각 억압-반동적 자유-억압의 구조가 두 번 진행됨을 말한다. 즉 이것은 일제 강점기-광복-이승만, 이승만-4.19-박정희로 도식화할 수 있다. 7은 생각보다 오래 대통령질을 해먹었는데도 더 해먹고 싶었던 박정희가 ‘한국형 민주주의’를 외치며 유신을 단행한 70년대의 두문자이다. ‘한국형’이 들어간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듯이 그 내실은 명실공히 공(空)하다. 빵은 무엇인가? ㄱ이 아닌 ㅃ는 더욱 폭발적인 느낌을 준다. 파열을 거쳐 입이 크게 열리는 과정은 자유에 대한 팡파레에 비견된다. 이것은 유신이...지고......이어질 대국적 정치에 대한 갈망으로 박정희에게 총알을 날림으로써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준 재규어의 탕탕질을 나타낸다. ㅣ에서 총알처럼 짧은 한 획을 밖으로 찍음으로써 ㅏ로의 해방이 진행된다.


유신이...진다......

    그러나 ㅃ와 ㅏ를 거친 후에는 다시 ㅇ으로 돌아온다. 해방의 탕탕으로부터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진행된 ㅇ자모양 문어머리의 개입으로 인해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로써 공공칠빵은 그 자체가 하나의 큰 ‘공’을 구성한다. 사실상 우리의 역사 자체가 강약약강의 리듬에 맞추어 진행되는 공공칠빵이었다. 푸코가 말했듯 잔인한 형벌에서 공공 기관(학교, 병원, 감옥)의 시선적 억압으로 교묘하게 구성되었을 뿐, 부정할 수 없는 억압의 역사이다. 문어머리 이후에는 괜찮아지나 싶더니만 그와 함께 했던 보통 사람이 뽑힌다. 괜찮아졌나 싶을 때 IMF가 오고, 무엇보다도 박정희가 떠난 공백에 공주ㄹ혜가 온다. 우리는 이렇게 공기처럼 만연한 공들의 비(非)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런 비어 있는 비존재를 품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끊임없는 공-가능성으로 점철되어버린 인간의 조건에서 필요한 것은 저 ‘-(하이픈)’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알랭 바디우는 진리의 선행조건으로 사건을 말한다. 이를테면 재규어의 발터가 내뿜은 해방의 공공칠ㅃ......판사님 야옹......바디우에 따르면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통한 식별과 분류의 체계이다. 함부로 재단한 자유와, 그 자유를 거부하니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이 이어지는 억압. 이는 자본주의-경제 성장이라는 일원적 논리 아래 진행된 박정희의 근대화 프로젝트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이렇게 하나의 기준으로만 진리가 전유될 때 바디우는 이를 일컬어 ‘봉합’되었다고 말한다. 전문 용어로 ‘공구리치다’라고 할 수 있겠다. (여느 메이저 언론의 공식 페이지 관리자도 쓰는 말인걸 보면 공구리는 확실히 전문용어다.) 이런 공구린 상황이라면, 총끝이 빛나고 방아쇠로 심판을 내리며 기꺼이 유신에 복수하고 ‘너 이자식 건방진’ 증오에 증오로 되갚은 재규어의 발터는 실로 ‘사건’이다.


가만 보면 모가지나 공구리 같은 말은 의외로 포멀한 말인가보다.

    그래서, 일상 속 공의 경계를 뚫고 오는 이러한 사건은 공백을 부른다. 사실상 철학은 진리를 논하기 위해 이런 언리미티드 고유결계, 아 아니 공백을 펼치는 것이다. (어디서 달달한 냄새가 난다면 착각이다.) 여하튼 바디우는 그 공백 가운데에서 교차하는 네 가지 절차적 조건, 즉 시, 수학, 정치, 사랑을 통해 진리’들’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런 위계 없는 진리들의 만남을 일컬어 공통된 가능성, 즉 ‘공가능성’이라 부른다. 이런 공가능성을 위해서는 어떤 한 가지 조건만으로 공구리-봉합되는 배타성이 아닌 탈공구리-탈봉합이 필요하다. 혀와 연구개로 닫힌 입이 열리고 공기같은 진리의 조건들이 범람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ㄱ을 넘어선 그 공백에서야말로 공-시적인 공가능성을 통한 진리들을 공히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슈탈트 붕괴 같은게 일어난다면 공연한 기분탓이다.


    공가능성은 common+possibility이다. comm-on의 단어 합성에서 시와 사랑을 통한 진리들은 탈봉합됨으로써 만난다. 여기에서 기꺼이 드루와 드루오라는 환대가 시작된다. 사실상 자유에 대한 억압은 나-타자 사이에 설정한 본질적 공구리에서 시작한다. 모가지에 쳐놓은 공구리를 걷어낼 때에 공기는 막힘없는 호흡으로 내쉬어진다. 사실상 억압하는 자가 공구리를 쳐 가두는 것은 가장 먼저 스스로를 향한다. 하지만 진리’들’이 순간적으로 나오기 무섭게 ㅇ받침같은 억압은 재-공구리질을 해댄다. 그래도, 공가능성을 버릴 수야 없지 않겠는가. 억압-자유-억압의 구조를 자유-억압-자유로 읽으면 어떨까. ‘공’이 아니라 ‘ㅗㅇㄱㅗ’로 발음한다면......아니 그냥 그렇다고요. 그냥, 어떠한 빈 가능성으로서? 그러니까 다른 의미의 공-가능성......여하튼 공가능성과 공구리 사이에서 오늘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며, 떨어질 듯 붙는 공그르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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